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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넘봄 | 서평
사람을 따라갈 때 보이는 좌표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 이 글에서는 ‘중심’이라고 잠시 이름을 붙여볼까 한다. 강사, 기획자, 예술가, 실무자, 보조인력, 활동가 등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개별 사람들에게. 그 ‘중심’이 본래의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로 쓰일지 혹은 다른 단어로 대체되어 쓰여도 무방할지 고민해 보는 것은 읽는 이의 몫이다. 


 만약 우리가 문화예술교육에 있어서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보통 그 ‘잘’은 ‘효과적으로’라는 의미로 일반화되어 쓰이곤 한다. 그렇다면 교육은 효과가 있어야 할까. 교육사업 기획서 후반부에는 ‘기대효과’를 최소 3가지씩 꼬박꼬박 적어 넣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효과를 실험할 수 있는 시간이나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얼마나 충분하고 명확한가. 기대효과를 내기 위한 현실적 지원이나 활용 가능한 자원은 누가, 어떻게, 얼마나 확보하고 지원해주고 있는가. 설마 몇 개월짜리 지원사업, 불안정한 고용상태, 실험보다는 실행이 다급한 상황 안에서 사람도 삶도 심지어 사회도 바뀌길 바라는 것은 아닐 테지. 설마. 

 혹은 문화예술교육의 효과를 핑계로 사회나 조직이, 또는 누군가가 ‘중심’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교육은 같은 배를 끌고 있는 사람들 개개인도 충분히 살피지 못하면서 저 멀리 보이는 어떤 의미나 목적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화예술이 무언가를 가르쳐야 하는 학문이 되니, 그 ‘무언가’와 ‘가르치는 목적’과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만 강조되어 그것을 행하는 ‘중심’들이 소진되고 있다. 문화예술은 사회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논리 안에서 이 ‘중심’들의 삶은 더더욱 소외된다. 좀 덜 임금을 받아도, 좀 덜 먹어도, 좀 더 일해도, 좀 덜 쉬어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해직 강사가 쓴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저자 채효정)’도 이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이 책은 (교육이든 삶의 현장이든) 어떤 활동의 주체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과, 그 조직이 표방하는 주제 안에서 소진, 소외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대학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대학이 누구를 위해, 누구와 함께 존재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단지 대학의 역할을 강조,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대학을 굴러가게 하는 모든 이들이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문화예술교육 현장으로 돌아와 ‘중심’들은 교육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관념적으로 들리기도 하는 이 질문을 좀 더 긴 예시로 풀어보자. 

 “지역문화재단의 문화예술교육사업에 참여하는 A는 2시간 수업에 44,000원의 강사료를 받는 보조강사이자 예술가이다. 1년간 정부지원을 받는 이 교육사업은 총 20회 진행되며 내년에 또 사업이 선정될지는 그때까지 알 수 없다. 
 A는 수업을 전반적으로 기획하지는 않지만, 재료를 준비하거나 자세한 활동내용을 계획하는 역할을 해야 하며 한 달에 1회 강사 회의에도 참여한다. 초등학생 10여 명과 진행하는 수업 안에서는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뭐라도 좀 같이 해보자고 다독인다. 
 수업이 진행되는 장소는 A가 사는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1시간이 넘게 걸린다. 자동차가 없는 A는 매회 무거운 수업 재료를 들고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를 오간다. 수업이 끝나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밥을 먹을 때에는 밥 먹는 모습이나 회의하는 사진을 따로 촬영하고 집에 돌아가 회의록을 작성한 후 정산보고서를 위해 영수증을 정리한다.”

 A에 대해 함께 질문을 던져보자. 

하나. A가 2시간 강사료로 44,000원을 받는 것은 합당할까.
둘. A는 보조강사 역할을 몇 건 정도 동시에 해내야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셋. 만약 A가 5건의 보조강사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는 그 역할에 모두 충실할 수 있을까.
넷. A가 교육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지 아닌지는 누구, 무엇에게 영향을 줄까.
다섯. A는 왜 수업을 위한 이동, 식사, 휴식을 알아서 해내거나 증명해야 할까.
여섯. A가 수업을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은 수업 재료 준비와 수업 보조가 전부일까.
일곱. A는 내년에도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믿거나 기대할 수 있을까.
여덟. A는 앞으로도 이런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것에 자발적 동기를 가질 수 있을까.
아홉. A는 현재 행복할까.
열. A는 자신이 문화예술교육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까.

 이쯤에서 나에 대해 털어놓자면 난 A보다는 조금 더 강사료를 받는 주강사의 역할을 하며 10년째 살아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것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개인 창작을 하는 예술가이며 운 좋게 지원사업에 선정되면 문화예술교육이나 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기획자이자 강사이다. 출산 후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때는 동네 학교에서 방과후 강사를 몇 년 하기도 했다.

 이런 나의 입장으로 위의 10가지 질문에 답변하자면 답변과 답변 사이에 한숨만 쏟아진다. 압축적으로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그건 분명하게 ‘아니다’이다. 그리고 이제는 대부분 사라진, 어디선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중심’들의 답변도 어느 정도 상상이 된다고 감히 말해본다.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해직한 강사가 받았던 대우나 통보가 구체적으로 ‘중심’들이 받는 그것과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그러한 상황을 발생시키는 구조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목적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적이 담론이거나 효과이거나 성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손에 잡히지도 않고 숨을 헐떡대지도 않고 발을 동동 구르지도 않고 힘들다고 푸념하지도 않는 것들. 

 그러나 사람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면 피곤해지기 일쑤다. 이 사람 저 사람 사정 다 봐줄 수 없다. 사정이 다 다르니 그거 따라가다가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 ‘어디로’를 정할 필요 없이 ‘사람 먼저’라고 하다간 요즘 같은 세상에 미련하거나 어리석다는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도 언제나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생계가 불안정하기도 하고, 배가 고프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하고, 감정에 치우치기도 하고, 능력이 좀 부족하기도 하고, 일의 효과적 진행보다 마음이 쓰이는 것을 먼저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서로를 살피는 과정 안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삶에 대한 철학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그것은 문화도 되고 예술도 되고 교육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문화예술교육은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보다 어떤 주제로 교육을 ‘한다’라는 것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이 연속되면 그 주제가 담고 있던 문제의식은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한다’, ‘안 한다’로 이분법화 되어 타자의 정치나 사회적 담론 안에서 간편하게 소모된다.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전공 교육의 특수성과 전문성 이전에 먼저 인간의 삶을 배우고 읽어야 한다’는 보편적 교육의 이념을 담고 출발했으나 현장에서는 그 이념을 위해 함께 노력했던 사람들을 모두 주인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과 같이. 교과 개편을 이유로 100여 개의 강좌가 정리되어 수많은 강사가 갑자기 강의의 기회를 잃은 것처럼. 그럼에도 후마니타스칼리지가 보편적 교육의 가치를 표방 ‘한다’는 것은 마치 어떤 기업의 브랜드 마케팅처럼 변함이 없듯이. ‘하고 있다’라고 하면 실제로는 어떻든지 간에 그 자체로 우선적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어떤 주제를 ‘한다’고 스스로 말하기 전에, 그와 관련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사람을 챙기고 활동을 채우는 사람, 사람, 사람, 그리고 ‘중심’들이 있다. 그들은 이따금 그 문제의식이 뒤늦게 만들어낸 공동의 테두리 안에서도 밀려나곤 한다. 어느새 지혜란, 각자의 문제의식을 도드라지게 드러내지 않으며 테두리 안에서 최소한의 자리 확보를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쨌든 버텨내라’는 말을 애써 길게 쓰자면 말이다.

 그만큼 단지 버티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 A의 삶을 보라. 수많은 A들, ‘중심’들. 많은 삶의 영역들이 그러하지만, 문화예술교육 현장은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는 경향 때문에 더더욱 ‘중심’들에게 힘든 장소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심’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정책이나 제도를 결정할 때, 예산지침이나 행정절차를 강조할 때, 현장이나 사업을 평가할 때, 교육의 의미를 논의할 때, 기획서를 쓸 때, 수업을 진행할 때, 그리고 교육현장과 직접 연결되어있다고 여겨지기 힘들지만 분명 연결된 삶의 매 순간.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중심’들을 위해서일까. 

 마지막으로 내 주변에 분명하게 있는 ‘중심’들의 본래 이름들을 마음속으로 나열해본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되어 불리거나 여겨지든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심지어 교육의 주제를 증명해내는 것보다 먼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예산을 투입‘했고’ 우수한 사업들을 ‘했다’는 답변은 정중히 사양한다. 이미 많은 ‘중심’들이 현장을 떠나거나 튕겨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지금부터 기억하자. 사람을 기억하고 챙기는 것에서 우리는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 최선영

예술가이자 창작그룹 ‘비기자’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비기자’는 무한경쟁시대에, 각기 다른 생각들이 꾸준하게 비길 수 있는 현장을 인문학적 문화예술 활동으로 만드는 창작그룹이다


지지봄봄
23호 넘봄 | 리뷰
‘굿 윌 헌팅’이 예술 강사에게 보내는 메시지
직면하는 힘에 관해
김유진 / 문화기획자



 지난 몇 년간 여름방학, 겨울방학 시즌만 되면 예술 강사를 대상으로 한 기획력 향상 워크숍 요청 전화를 받았다. 기관 담당자는 대부분 예술 강사의 창의적 교육 기획 능력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는데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심사 공모에 접수하는 문서 작성 능력, 회차로 구분된 커리큘럼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관성적 태도에 대한 비판이 핵심이다. 이 요청은 결국 행정이 요구하는 양식에 맞춰 기획서 쓰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사실 고민의 본질이 행정 이슈에 있기 때문에 관료 시스템과 문화예술교육 현장 사이에 낀 실무자 개인 차원에서 별다른 묘안을 내기 어렵다. 그럼에도 순수한 애정으로 고군분투하는 실무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나는 보통 워크숍의 취지부터 세부적인 커리큘럼에 이르기까지 방향을 전환하길 권한다. 워크숍 목표를 문서 쓰기에 두지 말고, 기획의 초동 과정인 아이디에이션에 집중해 예술 강사들끼리 서로의 욕구와 경험, 상상력을 나누는 장시간의 완결된 학습 경험을 디자인하라고. 즉, 교육 설계 연구를 위한 일종의 스터디 모임을 인위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업무 요청 전화를 받았으나 그것이 상담이 되고 결국 공동기획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어쩌면 사업 담당자보다 내가 더 배운 것 같기도 하다. 반복적으로 워크숍을 수행하면서 교육이 실제 작동하는 지점이 어딘지를 알게 되었고 예술 강사들의 현황도 주기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여러 해 문화예술교육계와 관계 맺어오다 보니 올해는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모니터링 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지역 여기저기 방문해 교육현장을 돌아보는 일은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지역의 단체나 예술가가 아이들, 청소년, 부모, 다양한 형태의 지역 공간과 제대로 교차할 때 교육의 생명력이 생겨났고 곁에 있던 나도 덩달아 마음이 훈훈해졌다. 모니터링한 단체들과 다시 모여 사업 점검 및 문화예술교육의 지향을 확인해보는 워크숍에 참여하는 일은 묘한 소속감까지 주었다. 

 그러나 관찰하는 흥미로움에 비해 모니터링 위원인 내가 과연 단체들과 얼마나 의미 있는 내용을 주고받았는지 되짚어 보면 좀 갸웃하다. 3시간짜리 수업이 끝나고 나면 강사들은 아이들을 챙겨 보내고 치우고 하느라 마음이 바빠 보였다. 대충 정리를 하고 나서야 우리는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 있었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쩐지 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심사위원들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그들에겐 자신을 프레젠테이션 할 수 있는 몇 분의 시간이 있었고, 나에겐 책임지지 않는 품평자의 위치에서 예의 바르게 몇 문장 던질 수 있는 발언권이 있었다. 기획자로, 동료로 의견 나누기를 기대했지만 깊은 맥락을 다루기엔 시간이 짧았다. 단체 입장에서도 중층적이고 입체적인 고민을 한 두 장짜리 문서 읽고 온 사람에게 갑자기 전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 같고 또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좀 묘연했다. 무엇보다 재단과 단체의 현실적 지위 차를 현장에선 간과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충북문화재단에서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워크숍에 참여해 달라고 했을 때 나는 방문현장에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아주 실질적인 기획 역량에 초점을 두고 싶었다. 문화예술교육은 ‘ㅇㅇ’이라는 정의, 관념과 추상으로 요약 표현되어 듣는 입장에선 교과서적으로 ‘바른’ 교육을 훈계하는 듯 보이는 상황에서 미끄러져 나가려면 어찌 해야 할까. 행정이 정해준 사업 틀을 벗어나 구체적인 질감을 가진 언어가 마음속으로부터 표출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충북 꿈다락, 경기 꿈다락 가리지 않고 모니터링 중 실제 들었던 질문들을 떠올려 봤다. e-나라도움에 대한 항의나 예산 증액 요청을 제하고 나니 교육 내용 면에서 동일한 맥락이 변주되는 현상이 보였다.  

“아이들과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고민되는 지점은 어디까지 강사가 해줘야 하느냐다.”
“참가 어린이 중에 간혹 주의집중이 안 되거나 협동 활동이 안 되는 아이들이 있다. 자신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경우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이다.”“가족 전체 참여 수업일 경우, 가족이 참관만 하는 것이 좋은지 수업에 참여한다면 어떤 형식이어야 할지 고민된다.”
“음악엔 전문적이지만 놀이 기획이 어렵다. 아이들 간의 사회 작용을 위한 어떤 기획이 있는지 알고 싶다.”
“모집이나 학생들과 친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냥 친한 것 이상의 교육적 관계가 필요하지 않은지 고민한다.”

 강사들의 머릿속은 어질러진 방처럼 참여자와의 관계 설정 문제로 혼란스러웠다. 참여자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맺으라는 지적을 받다 보니 친절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수업 진행 중 돌출적인 아이들을 통제하지 않으면 힘이 든다. 문제 해결을 위해 마냥 그 아이만 돌보자니 관계를 어디까지 책임져야 할지 모호하다. 좋은 관계가 형성되었지만 그럼 교육적 목표도 충분히 충당된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무는 것이다. 사실 내가 현장 활동가라도 딱히 답을 정할 수 없는 실질적인 어려움이다.  
  
 잘 풀리지 않는 생각을 몇 날 며칠 끌어안고 있다 어느 날 새벽 우연히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1997)’을 보게 되었다. 맷데이먼(Matt Damon)이 연기한 청년 윌은 세 번이나 입양되었다 버려진 어린 시절로 인해 사람을 쉽게 못 믿는 인물이었다. 그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본 대학교수 제럴드는 어떻게든 그에게 기회를 주고자 상담 치료를 받게 하는데 윌은 상담사들을 모욕주어 도발하는 방식으로 제럴드의 의욕을 꺾고자 한다. 영화 주인공이라서 매력이 있지 현실에서 평범한 친절과 호의를 베풀려는 사람들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행동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에게 숀이라는 천사를 보내준다. 숀은 윌의 마음속에 엉킨 실을 결정적으로 풀어주고 다시 매듭져주는 바늘이다. 감독 구스 반 산트(Gus Van Sant)는 극적인 연출 없이 잔잔한 대사와 일상적 상황들로만 영화를 구성하는데 영화의 압도적 분량을 차지하는 숀과 윌의 대화를 듣다 보면 “어, 이거 문화예술교육 이야기인가?“ 싶다.  

 “내가 미술에 대해 물으면 넌 온갖 정보를 다 갖다 댈걸? 미켈란젤로. 너는 그에 대해 잘 알 거야. 그의 걸작이나 정치적 야심, 교황과의 관계, 성적 취향까지도 말이야. 그렇지? 하지만 시스티나 성당의 냄새가 어떤지는 모를 거야. 한 번도 그 성당의 아름다운 천장화를 본 적이 없을 테니까.” 

“전쟁에 관해 묻는다면 셰익스피어의 명언을 인용할 수도 있겠지. 다시 한 번 돌진하세, 친구들이여! 하지만 넌 상상 못 해. 전우가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너를 바라보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걸 지켜보는 게 어떤 건지.” 

 이 장면을 지나면서 나는 ‘굿 윌 헌팅’을 함께 보는 무비토크를 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생겨났고 곧바로 이어지는 대사를 듣고서는 결심을 굳혔다. 숀은 윌이 아내의 암 투병을 조롱한 지난번 상담일을 되짚으며 솔직하게 마음을 다 열어 보여준다. 그림 한 장을 보고 숀의 인생을 다 안다는 듯 아프게 난도질한 윌의 행동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그리고 상처가 어떻게 금세 아물었는지에 대해. 동시에 윌 역시 그 스스로를 위해 방어벽을 낮추길 요청한다. 

 “네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고 네가 뭘 느끼고 어떤 애인지 ‘올리버 트위스트’만 읽어보면 다 알 수 있을까? 그게 너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너 스스로에 대해 말해야 해. 자신이 누군지 말이야. 그렇다면 나도 기꺼이 관심을 갖고 대할 거야.” 

 워크숍에서 대화 코디네이터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이 영화는 예술 강사들에게 보내는 중의적 메시지였다. 첫 번째 메시지는 강사와 참여자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굿 윌 헌팅’은 강사가 참여자에게 ‘직면’할 필요를 보여준다. 인간은 투명한 자에게만 투명하게 답한다. 숀이 윌에게 한 핵심적인 행동은 자신이 상처받았음을 꾸밈없이 전한 것이다. 특별히 문화예술교육 분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민주적 리더십이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선 겸허한 솔직함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맞추기 위해 굳이 ‘급식체’를 배우는 것보다 신뢰할만한 어른이 되는 일이 훨씬 어렵다. 질문의 방향을 대상자가 아닌 나에게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참여자가 중요하다고 할수록 참여자가 어떻게 해야 협력적이고 자발적이 될까 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몰두한다. 이때 변화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다. 

 반대로 나는 협력하지 않는 참여자와 어떤 위치에서 만나고 싶은지, 어떻게 만나야만 하는지 질문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몰입할수록 시선이 그에게 가 꽂히고 그의 이해되지 않는 행위를 해석하고 어떻게 대응할지 살피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복합적인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나는 교육자로서, 기획자로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목표 지점을 향해 가고 싶은지가 뚜렷해져야 한다. 결국, 참여자에게 직면한다는 뜻은 나 자신에게 직면한다는 뜻이 된다.  
 
 두 번째 메시지는 정책과 강사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수업 중엔 강사가 숀이고 참여자가 윌이지만 정책 현장에선 정책이 숀이고 강사는 윌이다. 우리는 정책적으로 천사 같은 숀을 만나본 적이 별로 없다. 허니 상처투성이다. 그럼에도 재능 있는 윌이 세상에 기여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선 이미 다 겪어 알고 있다고 말하는 대신 용기 내어 진실을 전할 언어를 더듬어 찾아야 한다. 많은 실패가 예견되지만, 그 실패가 밀알이 되도록 애쓰는 마음과 실패가 곧 나의 처지인 것처럼 결론 내는 태도 사이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본질적으로 갈린다.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 내에서 삶을 길어 올리기 위한 밀도를 추구하는 일의 중요성. 

 나는 꿈다락 워크숍을 통해 ‘굿 윌 헌팅’이 내게 전해준 이 메시지를 예술 강사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엉뚱하게도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생산적 논의를 하는 대신, 자이언티(Zion.T) ‘양화대교’의 훅이 반복되어 들리는 기분으로 말이다.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지지봄봄
22호 넘봄 | 서평
빛깔 좋은 생각 도구들도 꿰어야 보배다, 어떻게?
강정석 / 지식순환협동조합


창의성을 ‘강박’으로 요구하는 사회


 아마도 ‘창의성’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손꼽힐 것이다. 거의 모든 사회적 분야에서 우리는 창의성을 요구받는다. 나 스스로를 창의적이지 못한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각종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홍수와 함께 급변하는 뉴 미디어의 어지러운 환경 아래에서 도태되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창의성은 21세기의 ‘강박’과도 같다. 하지만 그러한 강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창의성과는 거리가 먼 것 아닌가. 그저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본다면, 어떠한 강박이나 구속 없이 자유롭게 내 생각을 가지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퍼즐놀이 하듯 ‘논다면’ 어느 순간 창의성은 불쑥 솟아오르는 것이 아닐까. 굳이 우리가 ‘창발성’ 같은 어려운 개념을 떠올리지 않아도, 창의성은 당연히 자유로운 생각들, 그리고 전혀 다른 생각들의 충돌과 마주침 속에서 비로소 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어쩌면 우리는 ‘창의적’이기 위해 사회에서 강박적으로 요구하는 ‘창의성’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는, 기묘한 역설과 마주하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편으로, 최근 인지과학이나 신경과학, 뇌과학 등의 발달로 인해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지닌 기본적 능력 중에 ‘상상력’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도 발견되었다. 즉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누구나 가진 ‘상상력’이라는 능력을 통해 ‘창의성’을 발현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이를 가로막는 여러 방해물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누구나 ‘창의적’일 수 있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Robert Root-Bernstein)·미셸 루트번스타인(Michele Root-Bernstein) 의 저서 『생각의 탄생』은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사람을 사로잡았던 책이다. 저자들은 누구나 ‘창조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사상가·과학자·예술가들이 가진 창작의 경험들을 분석하고 유형화하는 과정을 통해 ‘13가지의 생각 도구(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마지막으로 통합)’들을 제안한다. 이 13가지 생각 도구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으며, 창의성은 이 도구들을 훌륭하게 활용한 결과라는 것이 저자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우리는 저자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이를 충분히 익히고 적절한 훈련을 통해 발전시킨다면, 누구나 ‘창의적’일 수 있다. *이 책이 그동안 문화예술교육을 비롯한 광범위한 영역에서 널리 소개되고 읽힌 이유이다. 특히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의 커리큘럼을 구성할 때 활용될 수 있는 유용한 팁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점도 이 책이 가진 중요한 장점 중 하나이다. 


창의성 발현을 위한 13가지 생각 도구

 하지만 아무리 13가지 생각 도구들이 잘 정리되어있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이 도구들을 받아들일 수 없거나 특정한 도구들에만 특화된 감각을 지니고 있다면 잠자고 있는 창의성을 깨우긴 어려울 것이다. 저자들 역시 이를 “‘환상’과 ‘실재’ 사이의 단절”(36p) 이라고 표현한다. 쉽게 말해서 아무리 수학 공식을 달달 외우고 논리적 사고 능력이 뛰어날지라도 실생활에 이를 적용하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고질적인 ‘주입식 교육’이 이런 ‘헛똑똑이‘을 양산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칸트가 오래전부터 강조했던 이론적 인식을 위한 ’지성‘과 타자와의 관계를 위한 ’감성‘, 그리고 이를 연결해주며 윤리적으로 성찰하게끔 만드는 ’반성적 판단력‘이라는 인간 인식의 황금률은 결과적으로 지성의 비대함과 감성의 쪼그라짐, 그리고 결과적으로 반성적 판단력의 부재로 인한 성찰과 공감능력의 상실 등으로 이어져 왔다. 이 책에서 저자들이 이과와 문과, 그리고 예체능을 나누는 ‘분과 학문’적 교육이 얼마만큼 창의적 생각들을 저해하는지를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마치 과학자나 수학자 등 소위 ‘이과’로 분류되는 쪽에서는 논리적 사고능력이 필수적이며, 반대로 예술, 인문학 등 ‘문과’로 분류되는 쪽에는 창의성과 유연성, 감각능력 등이 필수적이라는 우리들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놓는다. 오히려 과학자들조차 특정한 ‘느낌’이나 ‘감정’, 그리고 자유롭고 유연한 ‘상상’을 통해 논리적 개념에 이른다는 것이다. 즉 예술가, 과학자, 사상가 할 것 없이 창의적인 사람들은 어떤 느낌과 직관을 갖고 특정한 대상에 접근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이러한 느낌 또는 직관은 적절한 훈련과 연습, 즉 ‘교육’을 통해서 더욱 강화될 수 있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가 창조적 상상력의 기반이 되는 느낌과 감정과 직관의 사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은 절대적인 명령과 같다. 그것이 ‘정신적 요리’, 혹은 교육의 요체다.”(32p)

 이러한 맥락 아래 저자들은 피카소(Picasso) 같은 화가와 아인슈타인(Einstein) 같은 과학자, 바흐(Bach)나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같은 음악가나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같은 무용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같은 소설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뛰어난 ‘천재’들의 연구 또는 창작 과정을 묘사하면서 앞서 언급한 ‘생각의 13가지 도구’들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 과정은 그 자체로서도 굉장히 흥미진진한데,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아인슈타인(Einstein)이나 모차르트(Mozart) 같은 ‘천재’들의 비밀스러운 머릿속을 몰래 훔쳐보는 ‘느낌’을 갖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저자들은 특정 분야에서만 뛰어난 ‘전문가’가 아니라 13가지의 생각 도구들을 잘 활용할 수 있는 통합적 사고능력, 즉 ‘종합지(綜合知, synosia)’를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필요한 것은 종합지를 이끌어 내기 위한 전인적, 통합적 교육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목적은 ‘전인’을 길러내는 데 있어야 한다. 전인이야말로 축적된 인간의 경험을 한데 집약하여 ‘전인성(wholeness)’을 통해 한 조각 광휘로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통합교육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오로지 그것 하나이다.”(429p) 13가지 생각 도구들의 종합적 이해를 통한 전인성의 획득, 이것이 바로 교육의 목적이며 창의성 발현의 기본적 전제조건이다.


경쟁적·도구적 창의성을 넘어, 협력적·공공적 창의성을 위한 상상

 하지만 저 13가지 생각의 도구들을 그저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내 안에 잠재된 창의성의 불꽃을 일으킬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저자들이 강조했던 ‘종합지’, ‘전인성’, ‘통합적 이해’를 창의성 개념에 대한 이해 자체에도 적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또 다른 창의성 연구자인 칙센트미하이(Csikszentmihalyi)가 ‘창의성의 시스템 모델’을 통해 강조했듯이, 창의성은 단지 하나의 ‘개인(Individual)’의 역량으로만 발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개인’의 창의성이 표출될 수 있는 특정한 ‘영역(Domain)’과 이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문지기’ 역할을 하는, 즉 창의성의 결과물이 그 영역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분야(Field)’가 함께 구성되어야 한다. 즉 한 명의 개인에게 잠재된 창의성은 ‘영역’과 ‘분야’라는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서야 비로소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따라서 창의성 자체는 오로지 ‘개인’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를 발현시키기 위한 사회적 환경이 어떻게 구축되어 있는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앞서 강조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창의성을 강박처럼 요구하고 있다. 창의성이 오로지 개인의 ‘역량’으로 환원되어 소비되고 있는 탓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개인의 역량을 중심으로 논의되는 창의성은 결과적으로 개인의 경쟁력을 높이는 수단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우리는 이를 ‘경쟁적’ 또는 ‘도구적’ 창의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생각의 탄생』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을 단지 개인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창의성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우리는 이 책을 발판삼아 13가지 생각 도구들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교육적 환경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즉, 개인에게 강박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경쟁적·도구적 창의성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매개를 통한 상호 성장을 도모하는 창의성, 즉 협력적이면서도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창의성을 상상해야 한다. 더욱 구체적으로, 그러한 창의성을 가능케 하는 시간과 공간의 가능성을 우리는 ‘학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학교가 살벌한 경쟁과 무관심, 그리고 냉소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창의성의 불꽃을 주조해낼 가능성의 시공간으로서의 ‘학교’를 다시금 상상하고 구체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이 바로 창의적인 ‘문화’를 만들어가는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강정석

 영화감독을 꿈꾸다 우연한 계기로 영상미디어교육 및 대안적 고등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어 관련 분야의 연구 및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하자센터)에서 판돌로 근무했으며, 지금은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사무국장, 다사리문화기획자학교 멘토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미래교육의 열쇠, 창의적 문화교육』(공저), 『누가 문화자본을 지배하는가』(공저), 『노오력의 배신』(공저) 등이 있다.


지지봄봄
21호 넘봄 | 서평
웰니스 신드롬 – 행복을 ‘사적인 것’으로 만드는 기술
칼 세데르스트룀 외 『건강신드롬』
채효정 / 정치학자

 

 

 “이상하지 않아? 옛날에 우리가 어렸을 땐 낚시, 등산, 야영, 들놀이, 물놀이 같은 것들이 다 서민들의 여가문화 아니었나?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문화가 전부 중산층의 표식이 되었어. 소박함은 사라지고 대신 뭔가 세련되면서 돈은 많이 드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지가 않고 그래.”
 
 그런 의문을 문득 품은 적이 있었다. 그 이유를 이 책 『건강 신드롬 』에서 알았다. ‘건강 신드롬’이라고 하면 뭔가 현대인의 건강 염려증이나 건강(정상) 강박증에 대해 다루고 있는 내용인 것 같은데, 책장을 넘기다 보면 놀라운 내용들이 쏟아져 나온다. 원제는 ‘웰니스 신드롬(wellness syndrome)’이다. 이화여대에서 평생교육 단과대를 만들어 신설하겠다고 했던 학과 중의 하나가 그 ‘웰니스 학과’였던가. 
 
 그 때는 잘 몰랐는데, 이 책을 읽으면 지금 많은 대학들에서 왜 이 ‘웰니스-’라는 이름을 단 학과들이 생겨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웰니스 산업은 결국 ‘행복을 창조하는 경제’로서의 “창조적 산업”인 것이다. 이런 창조경제는 심지어 노동도 새로운 개념으로 창조해낸다. “창의적 업무, 유연한 프로젝트, 네트워크형 조직, 선각적 리더십, 심도 있는 소통, 해방적 경영 등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이 도래하면서 일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39쪽) 노동과 휴식이라는 개념을 ‘행복’이란 개념에 버무려 예술적으로 재창조해내는 과정이 곧 웰니스라는 이름의 행복 제조 공정이었다.
 
 저자는 우리가 ‘잘 사는 것’이라 믿고 있는 삶의 방식을 하나씩 해부한다. 그리고 우리가 행복한 삶을 추구하면 할수록 어떻게 행복 그 자체가 물신화되고 우상화되는지, 내가 그런 식으로 행복해질 때 이 세계가 어떤 식으로 끔찍해지고, 나의 행복이 완성될수록 그것을 지탱하기 위한 타인의 삶이 얼마나 짓밟히는지를 폭로한다. ‘그런 식으로 행복해진다는 것’의 의미는 행복을 개인의 성취 과제로 삼고, 개인의 차원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웰니스’라는 단어는 바로 그 ‘개인적 행복’이란 것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러니 제목이 ‘건강 신드롬’보다는 ‘행복 신드롬’으로 번역되었더라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더 잘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한국에서 ‘건강’이란 것은 ‘신체적 건강’으로 협소하게 이해되는 측면이 있으니까 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행복이란 거의 강박증에 가까운 노력이다. 하지만 행복한 집, 행복한 음식, 행복한 가족, 행복한 삶을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설사 행복진다고 해도, 어쩐지 우리는 행복해질수록 공허해진다. 자기의 삶을 더 낫게 만들라고 하는 행복의 주문은 아무리 해도 만족될 수 없고, 일생을 끝나지 않는 자기 경쟁으로 소모시킨다는 것을 실은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집을 라이프스타일 북의 화보집 같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 건강을 위한 운동, 일 분 일 초도 헛되이 쓰지 않는 자기관리, 생태주의적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 정크 푸드를 거부하고 음식을 가려 먹는 것, 어느 곳에서도 멋지게 테이블을 세팅하고 식탁 위에 책과 음악을 함께 곁들일 줄 아는 것, 착한 소비와 공정여행을 하는 것, 계속 새로운 일에 흥미를 가지고 배우고 익히며 자신의 역량을 개발하는 것, 기부하고 봉사하는 삶, 그렇게 사는 걸 다들 잘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 믿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과연?’이라고 묻는다. 왜냐면 그게 ‘신드롬’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건강이 사회적 열광의 대상이 된 것, 그게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건강 신드롬’은 사회적 질병이며, 행복에 광적으로 집착할수록 사회는 불행하다. 

 

 요즘 사람들은 건강과 행복밖에 기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안 건강하고 안 행복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행복의 주체가 절대적으로 ‘개인’이 된 것이다. 국가와 사회의 행복(wellfare)을 통해 개인의 행복을 실현하려던 복지국가(wellfare state)의 이상이 해체된 이후에 행복의 실현은 개인들 각자의 과제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국가 수준의 행복 추구는 ‘웰빙(wellbeing)’이라는 좀 더 작은 행복의 개념으로 되었는데 곧 그 웰빙도 시장으로 흡수되었다. 이제 ‘웰니스’라는 추상화된 행복의 개념은 그나마 그 ‘웰빙’이란 개념 속에 연결되어 있던 ‘존재(beibg)’의 의미도 지운다. 이 웰니스라는 행복을 실현할 장소는 국가도 사회도 공동체도 마을도 가족도 아닌 ‘나의 몸’이다.

 

 이렇게 고립된 개인 주체에게로 소급된 행복 개념은 아침 방송과 종편의 각종 토크 프로그램을 통해 날마다 전파된다. 건강, 다이어트, 미용, 헬스, 스포츠, 음식, 취미, 실내 인테리어, 패션, 요가에 명상까지 ‘잘 먹고 잘 사는 법’으로 가득 차 있다. 웰니스의 전도사들은 사회의 유명 셀럽(celeb)과 의사들이다. 현대 사회는 정말로 의사들이 사회적 질병을 치료하는 시대다. 우리는 셀럽이 국민의 우상이 되고 지도자가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셀럽의 시대는 문화통치의 시대를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위인들은 더 이상 정치인이나 운동가, 지식인이 아니라 스타 셰프와 행복 전도사, 열정 넘치는 기업가다. 그리고 캠페인 표어는 ‘건강과 행복’이다.”(57쪽)

 

 심지어 그들이 자기의 몸을 통해 보여주는 미적 척도는 도덕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책에서는 그것을 ‘생명도덕’이라고 부른다. 그 사람의 생명-신체적 상태가 곧 그 사람의 삶의 건강함을 나타내는 도덕적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피부 상태나 모발 상태, 비만도, 골밀도, 간수치 등이 평소의 삶의 방식을 나타내고, 그 지표가 정상 범위를 벗어나 있을 때 생활방식을 수정해야 할 것을 권고받는다. 출연자들은 드러난 서로의 몸에 대해 부러움의 탄성을 지르거나, 경악과 혐오가 가득한 표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각자의 몸의 상태는 그들이 얼마나 잘 살았는지,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를 판단하는 도덕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생명도덕은 그런 식으로 자기관리라는 이름의 자기규율과 통제의 틀로 개인들을 몰아간다. 이제 그들은 아침마다 과일과 채소를 섭취할 것과 적절한 음식과 적절한 운동과 적절한 휴식을 권고받는다. 처방은 언제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다. 그 처방은 ‘소비’를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위해 유기농 음식을 구매하고 요가 매트를 사고 기능성 속옷을 사고 이불을 바꾼다. 얼마나 라이프스타일을 바꿀 수 있는지는 각자의 구매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경제 사정이 넉넉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개조 상품들도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다. 세탁기나 청소기를 바꾸지 못한다면 세탁기 세정제나 청소세제라도 바꾸고, 아침에 갓 짠 착즙 주스를 매일 배달시켜 먹는 대신 비타민제를 싼값에 대량 구매할 수는 있으니까. 상품에 의해 선택 당하면서도 스스로를 선택하는 주체라 믿는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순간이다. 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상품들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지’로 제공하는 시장사회는 계급화와 차별을 ‘취향의 차이와 선호에 따른 선택의 문제’로 둔갑시킨다. 싸구려 바지를 사는 것은 싸구려 취향 때문이 아니고, 가성비를 따지는 것은 합리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좋은 음식과 적절한 휴식, 레저와 문화생활을 향유하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돈과 시간이 없어서이고 이것은 사회의 문제, 정치의 문제인데 이 웰니스 신드롬은 그것을 교묘히 문화적 취향과 안목의 문제, 자기관리의 문제, 개인들의 선택의 문제로 돌리는 것이다.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웰니스 신드롬이 그 신드롬에 빠진 개인들만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생명도덕은 단지 추종자 개인에게만 고통을 가하는 게 아니다. 이들이 타인과 맺는 관계까지 바꿔놓는다. 웰니스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웰니스 신봉자는 역겨움을 토로한다. 이들의 독설이 공론장에서 통용되기 시작하면, 이성적 논쟁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227쪽) 취향의 정치, 정치의 미학화는 이런 과정을 통해 혐오의 정치를 탄생시킨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이 웰니스 신드롬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징조다. 어떤 문화든 자본과 시장은 그것을 상품화로 연결시켜왔고, 건강과 행복이 상품화된 것도 그 결과이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이 상품의 서열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들의 신분과 계급을 구별 짓고 있다. 그래서 이 라이프스타일이 지배하는 사회를 나는 ‘문화정치적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늘날 이 문화정치적 파시즘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표제어를 동반하고 내가 먹고 입고 쓰고 놀고 살아가는 모든 영역으로 밀고 들어온다. 웰니스 신드롬이 웰니스 파시즘으로 변모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웰니스의 기준에서 벗어난 모든 존재가 교정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되기 때문이다. 흡연자는 자기의 건강만 해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 사회의 건강을 해치는 사람이 되고, 공기 오염의 주범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담배 연기에 면전에서 코를 찡그리며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은 웰니스의 도덕을 거스르는 자들을 현장에서 즉결 심판하는 권리를 가진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공공장소인 도로에서 담배연기보다 훨씬 독한 매연을 내뿜고 있는 자동차 앞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것은 한여름 바깥으로 열기를 내뿜고 있는 에어컨 실외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도착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적 반응이 단지 흡연자들에 대해서만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뚱뚱한 사람들, 누추한 옷을 입은 사람들, 쓰레기 같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사람들, 식당에 아이들을 데려와 떠드는 사람들,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 술 취한 사람들,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대상이 된다. “하층민은 냄새가 난다”는 문장,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그 한 문장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 문장은 이 책에서도 나온다. 저자들 역시 웰니스 신드롬이 계급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를 설명하고, “역겨움이란 감정은 타인의 공중도덕, 문화적 교양, 양육 방식, 패션 감각, 성적 행동, 식습관 등을 재단하는 근거가 된다”고 말하면서 오웰의 그 유명한 문장을 인용했다.

 

 “서양에서 계급을 구분할 수 있는 진짜 비결, 유럽의 부르주아 중 자칭 공산주의자라고 해도 의식적으로 애를 쓰지 않는 한 노동자를 자신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요즘에는 내뱉기 조심스러워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았던 무시무시한 말 한 마디로 압축된다.” - 하층민은 냄새가 난다. 이 문장 앞에서 숨이 멎는 건 왜일까. 이 라이프스타일의 창조와 생명도덕화의 징후로서의 웰니스 신드롬은 부자와 연예인들의 생활 패턴을 동경하는 아침 방송의 소비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중산층 진보사회에서 종종 보이는 ‘북유럽 신드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강남 좌파’란 용어로 상징되는 이런 유럽식의 삶의 방식에 대한 동경과 행복 추구 노선 역시도 노동계급을 하층민의 이미지로, 좌파를 단지 ‘불평분자’로 둔갑시키고, 선을 넘지 않는 자기규율적 통제 주체를 시민적 주체성이라 믿는 질서-시민들의 질서 민주주의를 탄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금의 문화담론과 문화예술교육, 생활문화운동이 이런 웰니스 신드롬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관련 분야에서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꼭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이다. 아울러 이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레나타 살레츨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와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그리고 영국에서 노동계급이 어떻게 하층계급화 -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열등한 존재로 - 되었는지를 다룬 오언 존스의 『차브』도 함께 읽어보기를 권한다.

 

 생각해보면 낚시가 피싱이 되고, 등산이 클라이밍이 되고, 산보가 트래킹이 되고, 들놀이 물놀이가 캠핑이 되고 피크닉이 되고, 놀이터 공원이 테마파크로, 바다가 워터파크로, 민박집이 콘도로 되어간 그 시간이 우리의 삶이 자본과 시장에 종속되어간 시간이었다. 놀고 쉬는데 돈을 쓰기 위해 미친 듯이 돈을 벌어야 하는 삶. 우리는 어떻게 그 삶을 중단할 수 있을까. ‘혼자 행복’은 만인을 불행하게 만든다. 함께 행복한 길을 찾지 않으면 나의 행복도 없다. 지배하는 문화에 대항하는 ‘저항으로서의 문화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 채효정 :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예술과 정치」등의 인문 교양 강의를 하다가 해직되었다. 학교 측에서는 강의가 폐강된 이유는 「스포츠와 정치」라는 ‘중복과목’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과개편 과정에서 인문ㆍ예술 분야 과목들이 대거 축소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불복하고 학교 잔디밭에서 ‘대학은 모두의 것’이란 열린 강좌를 열어 학생들과 함께 문화적이며 정치적인 교육실천투쟁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함께 묻고 답했던 질문들을 엮어 얼마 전『대학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책을 냈다. 


지지봄봄
21호 넘봄 | 서평
삶의 여정에 감각과 의식을 깨워주는 ‘예술하기’
에릭 부스 『일상, 그 매혹적인 예술』
서지혜 / 인컬쳐컨설팅


 오늘날 예술가들은 예술이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의 필요에 응하며 역할을 확장해가는 데에 동원되거나 적극적인 탐색을 주도하는 활동에 꽤 비중 있는 시간을 할애한다. 지역 사회나 사회복지 시설, 교정시설, 학교와 기업 등에서 각기 다른 맥락의 필요로 예술의 협력을 청하고 있고, 이에 예술가들은 예술의 본령을 발휘하는 데에 자의나 타의에 의해 종종 교육이라는 방식을 택한다. 여기에 불안정한 경제 환경과 포스트모던 사회의 출현으로 인한 환경 변화에 따라 예술 단체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존재 맥락을 넓히려는 노력들이 가세하며 예술과 교육, 예술과 복지, 예술과 경제 등 예술과 사회와의 접점이 넓혀지는 추세다. 

 

 국내에서도 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문화예술교육정책의 주도 하에 그 확장세를 가속화해왔다. 지난 12년 간 규모와 속도, 자원으로 무장한 예술교육 사업의 전형과 논리가 전국에 확산 망을 형성했다. 그 과정에 예술과 예술가들이 동원되었고, ‘예술강사’라는 새로운 직군(職群)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정체성은 정책사업의 논리나 운영정책에 의해 재단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 주도의 궤적은 최근 들어 정책적, 내용적, 철학적 반성과 성찰을 요구받고 있으며, 정책기관 내외부에서의 능동적인 성찰과 예술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의 과정이 시작되고 있다. 

 

 이 시점에 예술의 본령을 다양한 맥락에서 구현하는 예술가와 교육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의 역할과 가치에 주목하며 교육적 활동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성찰의 과정은 특히나 긴요해 보인다. 예술가의 교육적 역할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필요하다. 이 질문은 개인적 질문인 동시에 사회적 질문이기도 하며, 방법적 질문 이전에 철학적 질문에 대한 각자 또 함께 성찰하고 답변하는 과정을 요한다. 


세상 만들기, 세상 탐구하기, 세상 읽기

 여기에 1970년대 미국의 교육하는 예술가(teaching artist)가 탄생하는 과정에 함께한 후, 그 진화를 능동적으로 주도해온 에릭 부스의 『일상, 그 매혹적인 예술(The Everyday Work of Art)』은 사고의 물꼬를 터준다. 일상 그 자체를 예술의 한 축에 올려놓은 에릭 부스는 반대 끝에 올려진 위대한 예술 사이에 과정적 예술 행위를 공통분모로 공유시키며, 인간 삶에서 예술의 존재론적 관점과 관계론적 관점을 제시한다. 예술을 하는 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의 예술행위―세상 만들기, 세상 탐구하기, 세상 읽기―가 삶에서도 적극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근대를 거치면서 삶에서 분리된 예술을 다시 사람들의 삶에 되돌려 놓을 것을 제안하는 관점이다. 완전체로서 존재하면서도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세상’을 상징적으로 사용하며, 예술가들이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발휘하는 기술과 마음의 습관, 관점을 사람들이 일상에서 행할 때, 개인의, 또 사회의 미래가 변할 수 있다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영향에 대한 신념을 보인다. 

 

 이미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흔하게 사용되는 예술의 일상화라는 표현에 이 책은 훨씬 풍요로운 이해와 공감과 더불어 예술과 교육이 결합하는 이유와 방식의 사고를 새로운 차원에서 열어준다. 예술이 특별하지 않은 일상과도 같다는 설명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일상을 예술처럼 특별하게 살 이유가 있고,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최적으로 성장시키며 생존 메커니즘을 지탱하는 축으로서 예술의 기술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다. 사람들의 무뎌진 감각과 인지를 작동시켜 모든 사람의 삶에 내포된 특별함을 파고드는 자세, 감탄과 흥미, 능동성과 즉흥성을 부활시키는 데에 예술이 교육과 결합할 이유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에릭 부스는 예술가들의 예술행위 기저에 존재하는 예술적 기술 다섯 가지, ‘열망’ ‘관찰’ ‘비유’ ‘문제의 재구성’ ‘적극적 참여’를 들며 예술가들의 내면의 기술을 섬세하게 조명하고 이를 일상에서의 예술 행위, 즉 세상을 탐구하고 읽고, 창조하는 과정에 적용하고, 이를 위해 훈련하는 방식을 다시 전문 예술가들의 방식과 연결 짓는다. ‘짜맞추다(putting things together)’라는 예술의 동사(動詞)적 의미를 회복시키며 현실의 삶, 일상과 맺는 상호참여적 관계에 대한 세심하면서도 자기 투영적인 그의 통찰은 교육하는 예술가들의 철학적 성찰에 즐겁고 의미 있는 참고가 될 것이다. 

 

 에릭 부스의 예술교육에 대한 관점과 철학은 교육철학자 존 듀이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새로운 예술교육이 추구해야 하는 ‘미적(aesthetic) 체험’을 단지 ‘무감각(anesthetic)’의 반대어라고 말한 존 듀이의 설명을 빌어 교육하는 예술가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적을 인간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현대 사회에서 미와 의미, 기쁨과 용기와 같은 것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의 학습으로 폭을 넓히는 데에 둔다. 이는 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교육하는 예술가(teaching artist)’의 개념을 형성하고 인력 양성을 맡아온 링컨센터에듀케이션(구, 링컨센터인스티튜트)에서 그의 예술교육의 실천과 철학의 토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곳의 상주철학가로 1976년부터 2012년까지 활동한 맥신 그린이 주창한 심미적 체험교육(Aesthetic Education) 활동의 근간에는 존 듀이가 강조한 예술의 능동적 체험, 미적 경험이 기반이 되어 있다. 맥신 그린이 예술을 개념적으로 접근하기보다 경험적으로 접근하며, 예술교육은 사람들의 언어와 삶의 관점에서 예술의 본질적 경험에 접근하고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주문해왔다면, 에릭 부스는 교육하는 예술가들이 이를 실천해가는 방식을 새로운 전문영역으로 구성하는 데에 앞장서 오면서 티칭 아티스트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예술성 교육하기(teaching artistry)를 위하여

 에릭 부스는 예술과 학습을 포괄하는 더 큰 진리를 교육 참여 예술가(teaching artist)에서 찾았다고 말한다. 국내의 예술교육 담론 장에서도 깊은 논의 끝에 ‘예술강사론’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도 여기에 그 연유가 있음을 많이들 공감할 것이다. 교육 참여 예술가와 이들의 활동 정체성의 개념은 여전히 진화 과정에 있고, 에릭 부스는 매년 국제 티칭아티스트 컨퍼런스(International Teaching Artist Conference)와 링컨센터에듀케이션 러닝랩을 통해 진화의 과정상을 정리하고 공유해가고 있다. ‘예술성 교육하기(teaching artistry)’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교육 참여 예술가들은 예술성에 내포된 역량으로 작업실과 공연의 경계 너머 다양한 환경과 목적에 참여하여,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관여하도록 하는 역할 인식을 공유한다. 다양한 맥락의 사회적 목적에서 예술가들의 활동을 확장된 개념의 예술교육으로서의 ‘예술성 교육하기’로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과정에서 맥락에 따라 예술이 도구적 효과성으로 대변되더라도 그 기저에는 참여자들의 ‘내면적’ 예술성을 활성화시키는 데에서 본질적 성과를 찾는다는 데에서 예술성 교육의 정체성과 경계 확장성을 확보하고 있다. 1990년대 말에 출판된 『일상, 그 매혹적인 예술』에서 주창한 예술교육에 대한 철학과 접근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반증이다. 

 

 교육 참여 예술가(teaching artist)에 대한 그의 통찰과 실행에 대한 접근은 최근 번역되어 출판된 『음악 티칭아티스트 바이블』에서 엿볼 수 있다. 그가 티칭 아티스트와 그 전도사로서의 역할에 한계를 느끼고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부여했던 시기에 찾았던 베네수엘라에서 예술교육의 존재 가치를 재확인해 준 엘 시스테마를 계기로 그의 예술성 교육의 건강한 확산을 향한 갈망과 능동적 활동은 40년을 향하고 있고, 세계 엘 시스테마 운동에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그 연유로 그의 교육 참여 예술가에 대한 개념과 실천적 이론이 음악 분야를 중심으로 집필되었다. 그는 『음악 티칭아티스트 바이블』에서 티칭 아티스트를 “예술의 기술적 교육을 넘어 예술적 방식으로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활동을 자신의 커리어의 일부로 택한 예술가”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21세기 예술가 모델인 동시에 관여도 높은 학습 모델이며, 미국 예술의 미래라고 덧붙인 바 있다. “비루투오조(virtuoso)  교육자”가 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여러 항목들을 제시하고 있는 가운데에 “가르치는 80%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이다”라는 그의 제시는 많은 이야기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예술에 대한 열정, 예술성, 즐거움을 담고 있는 예술가 개인 자체가 그 어떤 교육적 페다고지나 지식 정보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사람들의 심미적 체험의 접근이 요구하는 사람들의 삶의 맥락에서, 사람들의 관점에서의 대안적 방식에 대한 제안은 예술가의 사람에 대한,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와 읽기 역량을 전제한다. 

 

 교육 참여 예술가가 예술적 경험의 본질적 풍요로움과 기술을 사람들의 일상으로 유입시켜 삶이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역할자임을 낭만적 개념이 아닌 실천적 개념으로 조망한 에릭 부스의 성찰은 이미 20년을 거치면서 더욱 실감되는 현실이 되고 있다. 예술교육을 실행하는 교육하는 예술가들이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자기 철학에서 실천, 그리고 그 흔적이 남기는 파장에 대해 예술을 하듯이 갈망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할 이유이다. 그 과정을 조금 먼저 밟아간 에릭 부스의 두 책에서의 열정과 갈망이 좋은 에너지로 공감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교육’이라는 세상 만들기에 교육에 참여하는 예술가들과 예술강사들의 예술적 기술이 동원된 세상 탐구와 세상 읽기가 따로 또 함께 이뤄지길 바래본다.  

* 서지혜 | 인컬쳐컨설팅 대표. 예술경영분야 연구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예술이 사회의 다양한 접점에서 협업하며 시민의 삶의 결에 스며들 수 있도록 매개하는 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다.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 세종문화회관, 한국콘텐츠진흥원, 꿈의 오케스트라네트워크지원본부를 거쳤으며, 저서로는 『한국형 엘 시스테마, 아동청소년오케스트라 일궈가기』가 있다. 



지지봄봄


지지봄봄
20호 넘봄 | 서평
한 발도르프 교사의 생생한 교육 이야기
“8년간의 교실여행 School as a Journey”을 읽고
천윤희 / 광주비엔날레
삶과 교육, 그 통합적 여행에 들어서다 

  첫 아이가 6살이니, 나는 6년간의 여행 중이다. 직업으로서의 교사의 길을 탐색하던 때, 부끄럽게도 나는 오래지 않아,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아이들도, 교실도, 교사로서의 나의 길도 포기했었다. 그러나 아이 둘을 낳고서야 내면의 받아들임이 왔다. 두 아이의 엄마 됨은 중도에 그만 둘 수 없기에 이 길을 완주하겠다는 결심과 함께 막중한 책임감 말이다. 고백컨대, 나는 아주 오랫동안 자아 중심의 삶, 이것 아니면 저것 이분법적 가치를 갖고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런데 아이들의 ‘엄마’이자 ‘교사’로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 받았을 때, ‘엄마’나 ‘교육’에 대한 그림, 상(想)의 부재는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내면적이고도 사회적인 갈등은 아이들과의 아주 소소한 일상 속에서 커져갔다. 두 아이들은 먹고, 자고, 이가 나고, 걷고, 말하고 육체와 정신이 자라갔다. 아이가 말과 감정으로, 자기를 표현하기 시작하자, 아이와 나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처음 이 서평 요청을 받았을 당시, 아이의 성장 단계 변화에 결국은 내가 변해야한다는 생각이 들던 시점이었다. 변화를 위한 새로운 ‘상(想)’이 필요한 나에게 이 책은 영감처럼 왔다. 말로만 듣던 발도르프 학교에서 교사로서 실제 경험에 관한 책이라니, 교육 예술을 드디어 볼 수 있을까. 


발도르프 학교 교사의 8년간의 경험  

  이 책 ‘8년간의 교실여행’은 토린 M. 핀서(이하 저자)가 그레이트 베링턴 루돌프 슈타이너 학교 교사로서, 같은 아이들을 1학년부터 8학년까지 교육하면서 겪은 일들을 다루고 있다. 1982년부터 1990년까지 8년 동안 교육내용들과 함께 개별 아이들의 성장, 변화, 성취들을 저자는 책만으로도 교실 안의 역동과 내적 성장을 보는 듯 내밀한 흐름을 전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아이들의 변화를 관찰하고 동시에 그 변화에 맞추어 교사 자신이 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조정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교육 및 수업계획은 바로 그 아이들의 변화와 발달 단계, 개별 기질과 성장 속도 등을 고려한 내용으로 만들어간다. 교사는 별도의 정해진 교과서가 없이 각 학년별 발달 단계와 아이들의 기질을 고려한 수업을 계획하는데, 대부분 수업 자료는 선생님이 직접 쓰고, 그리고, 만든다. 학생들은 자신이 배운 것을 그리고, 쓰는 데, 이것이 곧 교과서가 된다. 

  유아기가 주로 모방과 본보기를 중심 교육원리로 수업한다면, 2단계 7세부터 13세까지 8학년은 교사의 권위와 그것을 따른 학생의 자세를 교육의 원리로 한다. 발도르프 교육은 담임 중심의 주요수업과 전문가과목으로 구성되는데, 동료 교사 집단의 공동체적인 성격과 협력 작업을 중시한다. 공동체란 계속 발전하는 창조적 집단으로 공동의 전망을 갖고 서로 협력하고, 개인적인 재능과 성취를 존중 받으며, 다양성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과정에 가치를 부여한다. 교사들이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밑그림을 가지고 살아있는 공동체로 만들려는 노력이 아이들에게도 전달되는 교육적 경험을 고려한다. 전문 과목에는 오이리트미, 음악, 체육, 수공예, 목공, 외국어가 포함된다. 


학년별 발달 특성과 한 발도르프 교사의 슈타이너식 교육  

  이 책은 총 8장으로 각 장을 학년별로 할애하여, 교실 속 풍경과 아이들, 중요한 교육의 순간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생생하고 감동적이고 세밀한 이야기를 짧은 글 안에서 담기 어려우나, 저자의 각 학년별 주요한 발달 특성과 교육을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① 1학년 아이들을 맞이하기 전에 아이들에 대한 내면의 그림을 보완하고 부모들과의 관계 맺기를 위해 가정방문을 한다. 아이의 방, 장난감, 장식품, 형제 자매간의 상호작용을 보고, 가족 간의 역학관계를 관찰한다. 이 시기는 주위 환경에 동화되기에 교실이 아름다워야 하며, 교사의 언행도 모방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모방의 시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이를 활용한다면 중요한 교육수단이 된다. 아이들은 아침 리듬활동과 시 낭송으로 하루를 열고, 다양한 놀이, 쓰기, 읽기, 셈하기 등 활동가 동화의 세계에 푹 빠진 아이들의 연극수업으로 진행된다. 저학년은 생일잔치가 중요하며, 생일에는 직접 삽화를 그린 특별한 생일시를 선물한다. 

  ② 2학년은 새일잔치 때에 ‘우화와 성인이야기’ 활동을 한다. 우화를 선정할 때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개개의 아이들이 당면한 특수한 문제를 염두에 둔다. 그 예로서, 발달 속도가 느린 편인 루시의 생일이야기는 자연의 이야기인 ‘활짝 핀 히스꽃’이다. 교사는 이야기 외에 침묵 하면서, 이야기의 ‘회화적 요소’가 스스로 아이들에게 전달되길 기대한다. 이야기가 말하는 환경적, 사회적 의미가 아이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 것이며, 특히 생일을 맞이한 아이에게 강렬한 내면의 그림을 심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 의미는 동료 아이들에게도 전해진다. 2학년 선생님은, 교사 자신이 2학년이 되어야 했다. 예술적인 교수법은 힘들고 고단하지만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주었다. 

  ③ 8-9세 아이들은 세상일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고 싶어 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해 하며, 건축, 제빵, 농사과정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3학년 주요수업은 성경이야기, 수와 셈(도량형), 집짓기, 형태그리기, 농사짓기, 반 연극, 소풍, 건축 프로젝트 등이 진행된다. 이 시기 아이들은 ‘외부세계’를 자아와 분리된 존재로 경험하기에 ‘권위 있는 지혜’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년기의 한 전환기에 외적인 권위를 경험하면 개인의 영혼에서 우러나는, 즉 내면의 힘에서부터 나오는 진정한 자유로 나아갈 수 있기에, 이 시기에 부모와 교사는 그들을 ‘놓아주어야 하는 순간’ 중의 하나다. 

  ④ 4학년은 북유럽신화, 분수, 동네학, 문법, 동물학, 형태그리기, 그림, 말하기를 가르쳤다. 4학년은 슈타이너의 언급 “우리는 공감과 반감의 리듬으로 영혼의 씨앗을 만들어낸다”처럼 공감과 반감 사이의 균형을 유치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한다. 시낭송은 그 둘의 통합에 도움을 준다. 

  ⑤ 우아한 몸놀림과 균형은 5학년 아이들의 특징으로 자신의 개별성을 녹여 전체 분위기를 맞출 수 있다. 5학년은 음악과 시, 다양한 축제, 지리학, 식물학, 신화, 고대의 인도, 페르시아, 바빌론, 이집트, 크레타, 그리스에 역점에 둔 고대사의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역사적 징후와 의식 변화를 본질을 찾는다. “각기 수많은 진화단계를 거치면서 인간성이 역동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역사를 배우는 것이 자신에 관해 배우는 것이라 본다. 이 모든 수업은 주기 집중수업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러한 교수법은 교수 내용이 시간을 두고 ‘저절로’ 조용히 익어가게 한다는 지혜가 깔려있다. 

  ⑥ 6학년 아이들은 세상을 ‘경험’하기 원하며 개념적 사고에 매력을 느낀다. 이때의 아이들은 변화가 많아 새로운 교수방법을 원하는데 실제적이고, 명료하고, 무엇보다 공정한 사람을 원한다. 이 시기에는 음향학, 열, 자기학, 광학, 기하학, 광물학, 역사(로마사), 은행업, 물리학, 자전거마라톤 등의 수업을 했다. 

  ⑦ 7학년은 교사를 아이들이 그들에게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는 강력한 변화에 직면하지만, 결국 ‘이 아이들은 누구인가? 이 아이들의 교사가 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라는 초기의 의문으로 되돌아가 아이들을 관찰하기 시작함으로서 극복한다. 아이들이 자신과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전기(傳記)’를 많이 활용한다. 전기는 하나의 징후, 인물의 삶과 분투를 통해 특수성 속에 보편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저자는 탐험가들을 주로 선정하여 공부하는데 이와 지질학 등의 수업이 연결된다. 또한 대수학 생리/보건학, 영어(시 쓰기), 천문학, 물리학, 역학, 르네상스 예술, 독일어 수업으로서 연극 등을 배우며, 주요수업은 주로 묻고 답하고 토론하면서 세미나 형태로 진행한다. 

  ⑧ 마지막 8학년을 뒤돌아보며, 저자는 이 때가 과정의 마무리였기 보다는 오히려 모퉁이 도는 것, 반환으로 본다. 8학년이 된 아이들은 때때로 모호함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을 꺼리지 않게 된다. 역사 수업은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려는 인간의 투쟁에 초점을 두고 여러 혁명을 살피고, 역학, 생태학, 유기화학 등을 배우며, 인간의 행동과 환경 사이, 혹은 과학과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중심으로 보았다. 세익스피어 <십이야>를 낭독하고, 그 시대의 노래, 의상을 공부하고 적합한 배역자를 찾아 연극 공연으로 올린다. 이 모든 수업들은 학과목과 문화 간의 관계라는 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하며, 항상 인생의 복잡한 문제들을 우선 느낌의 수준에서 다루고 그 다음에 사실과 상을 가져오도록 노력했다.  


최고의 순간은 아이들의 가르침에 내가 진정으로 열려있을 때이다.

  이 책 슈타이너의 철학에 기반 한 발도르프 학교 교사로서의 교육 이야기이자, 저자 개인적 삶의 주요한 사건을 통한 삶의 영향과 교육자로서의 내면의 변화 등도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교사 본인의 내적 균형, 부모와 교사 간의 협력, 교사와 교사간의 협력과 지지는 중요한 힘이자 전제이다. 아이들이 졸업 후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책을 저술하기 시작한 저자는 책의 말미에 고백한다. “아이들을 알아 가면 알수록 내가 깨달은 것은, 그들이야말로 끊임없이 나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신선하고 영감을 주며 별의 지혜로 가득한 보고를 지니고 있는 듯하였다. 나에게 있어 최고의 순간은 그 아이들의 가르침에 내가 진정으로 열려있을 때였다. 그들의 가르침에 깊이 감사한다”  

 이 책은 많은 교사들과 부모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며, 다른 차원의 내면의 갈등과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나로서는 8년의 여정 동안 아이들과 함께 변화하며 성장해가는 ‘아름다움’과 ‘성취’에 새삼 교사와 교육, 인간에 대한 경외감이 든다. 또 하나의 그림, 상想을 보았다. 고마운 일이다.  


- 천윤희
  광주비엔날레가 좋아서 광주로 내려온 이래, 생각보다 오래 일하고 있다. ‘문화예술’을 통해 ‘사람’과 ‘삶’이 보다 풍요로워 질 수 있는 지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문화매개’, ‘매개자’, ‘예술경영’, ‘문화예술교육’을 연구하고, 글 쓰고, 일한다.


지지봄봄
18호 넘봄 | 서평
세상 헛것들에 던지는 날카롭고 꼿꼿한 시선
정양의 시집 『헛디디며 헛짚으며』 (모악, 2016.) 서평
최기우 / 극작가, 최명희문학관 학예연구실장

  귀싸대기를 때리고 싶은 때가 있다. 여러 매체를 통해 들려오는 세상사는 이야기는 그 마음을 더 간절하게 한다. 썩은 계란으로 과자 만들어 파는 상인, 추가 근무 수당 받으려고 실리콘으로 가짜 손가락 만든 공무원,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아파트 평수 따라 아이들을 줄 세운 교사, 강의를 볼모로 시간강사의 강의료를 삥 뜯은 교수, 병원 지원금에 눈이 멀어 노숙자들을 감금시키고 사람 장사한 병원장, 멀쩡한 남의 집 가장을 뺑소니를 한 파렴치한,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이 장관·총리하겠다고 발악하고 발악거리는 놈, 일당 4백만 원 종이접기로 황제노역하는 놈, 위장전입·투기·탈루·표절 4종 세트에 병역 면제까지 자격 조건 착실하게 갖춰 주신 정치인…. 잔인하고 비열하고 치사하고 간교하고 악착스러운 세상이 드러날수록 귀싸대기의 짜릿함을 느끼고 싶다. 그러나 서민이 불행한 나라, ‘갑질’에 주눅이 든 세상에서 소시민은 귀싸대기를 칠 호기는커녕 알게 모르게 맞고 맞으며 살아간다. 
  시인 정양의 『헛디디며 헛짚으며』(모악, 2016.)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귀싸대기 올려붙일 줄 아는 시인의 눈 부라림이 생생한 시집이다. 

수사권도 기소권도 없이 백성들은 / 되감기는 세월의 과녁을 정화하게 쏜다 / 
이게 진상이냐 이게 구조냐 / 이게 루머냐 이게 불온이냐 / 
이게나라냐이게나라냐이게나라냐 / 바다도 비좁다고 파도는 몸부림치고 / 
꽂히는 화살마다 부르르 떤다
-「이게 나라냐」 부분 

  시인은 가장 낮은 자리에 시선을 두고 삶의 바닥을 더듬는다. 헛딛고 헛짚으며 살아온 한국 사회의 맹점을 자신의 경험에서 꺼낸다. 시대의 질곡과 역사에 대한 진중한 성찰과 반성. 자신의 비분강개를 여과 없이 쏟아내지 않고, 그곳에서 딸려오는 기쁨과 슬픔과 노여움과 애잔함까지 한 덩어리로 끌어안는다. 각각의 시편에서 드러나는 헛헛한 웃음은 덤이다. “자식에게 예사로 경어를 쓰는 / 아들녀석 말투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시인은 세 살짜리 손자에게 “현관을 발로 힘껏 걷어차고 / 야이 씨팔 문 안 열래? / 큰 소리로 외쳐보라고” 문 여는 방법을 알려주는 “솔찬히 아구똥한 할아버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손자는 시키는대로 / 야이 슈발 문 안 열래? / 야이 슈발 문 안 열래? / 시키지 않아도 거듭 걷어차며 외친다”(「야이 슈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다. 

“세상이 많이 변했으니 문학적 상상력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래도 시인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봐야해. 또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를 개선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어야 하고. 서정시를 쓰더라도 역사에 대한 통찰을 전제로 해야 하고. 시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의 진정성이겠지. … 그저, 어둡고 고단한 시대를 견뎌온 사람들의 열정만은 쉽게 지나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야.”(정양) 

  시인의 진정성은 고단한 시대를 견뎌온 사람들에게 건네는 오랜 시선에서도 찾아진다. 그가 2005년 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문학동네)를 통해 풀어낸 유년의 기억. 징용을 피하려고 전쟁 내내 벙어리 행세를 한 장구재비 기수 아저씨(「아 그 장구재비가 글씨」)와 시집올 때 가마에서 방귀를 뀌었다는 루머에 평생을 시달린 꽃각씨 할머니(「꽃각씨 할머니」), 소주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쇠자래기로 죽을 쑤어 먹고는 학교 가는 길에 취해서 논두렁에 픽픽 쓰러지던 아이들(「쇠자래기죽」)…. 한국전쟁부터 5·16군사쿠데타에 이르는 질곡 많은 시절을 견뎌 온 사람들이다. 

중간고사 끝난 다음 주 노총각 영어선생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용출이를 불러내더니
답안지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꾹꾹 찍으면서
시험이 장난이냐 이 쌍녀르 새끼야
쌍소리 묻은 쓰리빠로 철썩철썩
용출이 낯바닥을 때리다가
쓰리빠도 내던지고 주먹질로 발길질로
미친 듯이 퍽퍽퍽 두들겨팼다 
…(중략)…
해브 투로 짧은글 짓는 문제에
우이 해브 투 핸드플레이라고 썼더니 저런다고
눈물을 훔치며 용출이는 더 크게 울었다 
-「We have to」 부분

  『헛디디며 헛짚으며』에는 1940-50년대 교육현장을 그린 시들이 있다. 귀싸대기를 올리고 싶지만, 귀싸대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 이 시집에는 “머리통에 어깻죽지에 / 뭉치자 삼천만, 깨뜨리자 삼팔선 / 그런 종이 띠를 두르고 / 양팔간격으로 늘어선” 1940년대 국민(초등)학생들이 있고, 양팔간격 사이로 “줄 틀리는 아이들을 단속”하는 선생님들이 있다(「깨뜨리자 삼팔선」). 수업 시간에 “출입문 드드륵 밀고 들이닥쳐 / 머리 긴 아이들 머리통에 한 줄씩 / 드르륵 드르륵 신작로를 내놓고” 나가는 1950년대 바리깡 훈육부 선생님이 있고, “그렇게 길들기가 죽어라 싫어 / 일주일 넘게 신작로를 그대로 이고 다닌” 학생도 있다(「신작로」). 시인은 스스로 이 시절은 “황량했다”고 고백한다. 바르지 못한 시대의 바르지 못한 일들. 실제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철썩철썩 학생들의 귀싸대기부터 갈기는 선생들이 꽤 많았다. 반세기가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 그 시대의 선생과 학생들은 복잡하고 참담한 시대를 살아가는 노(老) 시인의 애잔한 그리움이자 씁쓸함이며, 여전한 통증이다. 

  그리고 시인이 기억하는 두 선생님이 있다. 정작 이름 석 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이들이 보여준 행동은 그의 귀를 번쩍 열리게 했고, 입술까지 지그시 깨물게 했다. 

  “원래 건달이었는데 이사장 친척이라서 / 자격증도 없이 체육선생이 되었다고들” 했던 “별명이 무식이었던 체육선생님”은 농구공·배구공·축구공을 던져주고 알아서 편을 짜고 놀다가 끝나면 공들만 체육실로 가져오라 시키고 당당하게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은 자신의 수업시간에 소지품 검사를 하겠다고 들이닥친 훈육부 선생들에게 “왜정 때 배운 대로만 풀어먹을라고 저 지랄들을 해댄다.”고 쌍욕을 하며 막아서기도 했다(「잃어버린 이름」). 분필 하나 달랑 들고 교실에 들어서는 “왔다리갔다리 시계불알 화학선생님”은 출석도 안 부르고 차렷 경례 끝나면 곧바로 노트도 책도 없이 고개를 한 번씩 좌우로 저으며 수업 내용을 칠판에 빼곡하게 적었다. 아이들이 책상을 두드리거나 발을 구르거나 말거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시험 답안지에 모두 “×”를 친 시인에게 “이 세상에는 옳은 일보다 그른 일이 많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제대로 채점하면 60점인데 기분 좋아서 100점”(「화학선생님」)이라고 말하던 선생님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옳은 일보다 그른 일들이 많아지는 세상에서 그이들에 대한 기억은 시인을 지금의 시인으로 성장하게 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정양 시인은 다른 시인들과 달리 “발표한 작품이라도 고칠 데가 있으면 고쳐야한다”고 말한다. 시대도 사람도 변하다 보니 지나간 것을 보면 당연히 고칠 게 많다는 것이며, 이는 “눈 감기 전까지는 자기가 쓴 시를 고치는 것이 시인의 의무”라는 믿음이다. “주례를 한 번 서더라도 관리를 해줘야 하는데 하물며 시는 더하지요”라는 게 시인의 말이다. 시집에 실린 시를 다시 고쳐 내듯이 시인은 묵히고 삭힌 기억들을 또렷하게 다시 살려낸다. 그 아득한 기억들은 어둡고 답답한 굴레에서 벗어나 소소한 것을 위대하게 하고, 비루한 것을 장엄하게 한다. 사람들의 곁에서 시글시글 스멀거리며, “헛디디며 헛짚으며 갈 데까지”(「핏발 선 눈을 가리고」) 가더라도 기어이 귀싸대기 때릴 순간을 기다린다.


○ 시인 정양


1942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시인은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1968),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1977)에 당선돼 등단했다. 반세기에 이르는 시 쓰기와 함께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까지 중·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으며, 1981년부터 2007년까지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지도했다. 전북작가회의 회장으로 활동하며 전북 문단을 이끌고 가꿨다. 시집 『까마귀떼』, 『수수깡을 씹으며』, 『빈집의 꿈』,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 『철들 무렵』와 수필집 『백수광부의 꿈』, 평론집 『판소리 더늠의 시학』, 『한국리얼리즘 한시의 이해』 등이 있다. 제1회 아름다운 작가상, 제7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정양’은 프로필 몇 줄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가 김병용이 어느 시집 발문에 썼던 것처럼 우리는 늘 “정양 선생이 아니었다면…”을 반복한다. 
“정양 선생이 아니었다면, 최소한 우리 술자리의 삼분의 일쯤은 소집되지 않았거나 훨씬 일찍 파했을 것이다. 정양 선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미국이나 총칼로 집권한 군인들을 조금 덜 미워했을지도 모르지만, 육회나 바지락죽의 깊은 맛도 몰랐을 것이다. 이병천 형이 수도 없이 막걸리 값을 치르는 일도, 늘 바쁜 안도현 형이 새벽에 전주에 도착하고도 집 대신 ‘새벽강’으로 달려오는 일도, 톱 연주자 같은 박남준 형의 노래를 그렇게 자주 공짜로 듣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김병용)

*최기우 
1973년 전북 전주 출생.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2003년과 2014년 전국연극제 희곡상 수상. 희곡집 『상봉』, 창극집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여행서 『전주 느리게 걷기』 등이 있다. 최명희문학관 학예연구실장.



지지봄봄
18호 넘봄 | 서평
나이 듦과 삶의 완성
로마노 과르디니, 『삶과 나이: 완성된 삶을 위하여』 김태환 역(문학과 지성사, 2016.) 서평
박경미 /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이 책의 저자인 로마노 과르디니는 매우 중요한 현대 가톨릭 신학자이다. 과르디니는 좁은 의미에서의 신학 울타리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사고 범위는 대단히 넓었다. 그는 1885년 생으로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태어나고 활동했지만, 신학적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길을 예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20세기 현대 문명이 제기하는 도전을 신학적 성찰의 주제로 받아들임으로써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선구자가 되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교회는 현대 세계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방어적으로 대응했다. 당시 신흥국가였던 이태리에게 교황령을 빼앗겼던 가톨릭교회는 세속 국가들이 교회의 활동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또한 20세기 초 부상하는 공산주의를 파시즘이 제어할 수 있으리라는 잘못된 기대를 가짐으로써 가톨릭교회는 나치즘과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를 묵인하고 동조했다. 이런 수세적인 입장을 일거에 뒤집은 것이 1962년 시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다. 현대 세계에서 고통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교회는 두려움과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 현대 세계의 인류와 그 삶에 개입하게 되었고, 교회 자신의 개혁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근저에 깔려 있는 정신은 신앙과 실천, 신앙과 문화의 유기적인 통전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점에서 과르디니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선구적으로 보여준 신학자이다. 과르디니는 1910년 사제 서품을 받은 이후 학자로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면서도 사목 활동을 했다. 특히 그는 청소년 운동에 관심을 쏟았다. 또한 그는 사제로서, 학자로서 나치에 굴복하지 않았고, 그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했다. 1930년대 가톨릭교회가 나치의 활동에 대해 묵인하고 있던 상황에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던 그는 나치 당원의 감시를 받다가 1939년 베를린대학 강의를 박탈당했다. 이후 그는 나치에 대한 신학적 고찰로 『신화 속의 구원자』, 『계시와 정치』를 썼다.

  이러한 과르디니의 행동은 그가 신앙과 실천의 일치에 대해 예민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의 연구 주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과르디니의 박사 학위 논문과 교수자격 취득 논문 주제는 둘 다 보나벤투라의 신학이었다. 과르디니는 아퀴나스의 스콜라철학에서 유래한 분석적이고 추상적인 신학적 경향보다는 구체적인 현실에 관심을 가진 보나벤투라의 신학 쪽으로 기울었다. 또한 그는 프란치스코회의 종합적이고 유기적인 신학 방법, 즉 인간 삶의 다양한 영역과 주제들을 끌어들이는 종합적인 신학방법론을 선호했다. 그는 인간 삶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 “기독교적 세계관”을 밝히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아마도 이러한 신학적 경향이 신앙과 실천의 유기적 통합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그를 이끌었을 것이다.

  또한 과르디니의 전 신학적 경향을 관통하는 것은 신앙과 문화의 상관성이다. 그는 신학자는 신학, 철학만이 아니라 문학과 정치, 사회학, 과학 등 지식 전반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방대한 연구는 현대 기술 문명과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었다(『근대의 종말』). 이후 과르디니의 문명 비판을 잇고 있는 인물로 이반 일리치를 들 수 있다. 과르디니는 문화 연구에 기초해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밝히는 데 주력했고, 전후 여러 해 동안 뮌헨 대학에서 이 주제로 강의를 하였다. 또한 그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현대 세계 인간 삶의 다양한 영역들에 대해 많은 방송 강의, 대중 강연을 했다. 그는 100편이 넘는 책을 썼으며, 그 글들은 한결같이 전문적인 신학의 경계를 넘어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면서도 결코 녹록하지 않은 깊이와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저술을 접하면 마치 스테판 츠바이크를 읽을 때처럼 원숙하고 풍요로운 인문학적 지식과 통찰,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책 역시 강의록과 방송 강연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그의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면서도 상식을 토대로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이 책에서 과르디니는 인간이 태어나 성장하며 자기를 형성하고 쇠락해가는 삶의 여정을 통해 어떻게 완성된 삶으로 나아가는지를 삶의 전체성에 입각하여 각 시기의 의의를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삶을 유년, 청년, 성년, 중년, 노년, 말년 여섯 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의 특징과 윤리적 과제를 기술하고 있다. 각각의 시기 사이에는 위기가 있고, 그 위기의 성격으로부터 다음 시기의 과제와 특징이 도출된다.

  과르디니는 가치형상(Wertfigur)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각 시기를 기술한다. 가치형상이란 “몇몇 지배적인 요인의 영향 속에서 고유한 특성을 지닌 일정한 가치들의 그룹이 형성되고 부각되는 것”을 가리킨다. 각 시기의 구조에 근거한 가치형상은 그 시기의 삶에 자연스러운 동력을 부여하며, 적극적인 윤리적 규범을 발전시키게 된다. 각각의 삶의 시기는 고유한 가치형상을 발전시키고, 이와 함께 고유한 윤리적 가능성과 과제가 정해진다.

  이에 따라 과르디니는 이 책에서 인생의 각 시기의 전형적인 형식을 발견해내고 그것에 근거하여 성숙한 인격, 완성된 삶을 향한 길이 어떠한 것인지 모색하고 있다. 가령 청년기의 가치들에는 진실성, 용기, 순수함 등 여러 항목들을 포함하지만, 이것들을 엮어주는 하나의 지배 요인은 청년이 스스로를 떠맡아야 한다는 요구이다. 따라서 청년에게 요구되는 윤리의 핵심은 자신에 대한 용기이다. 자신의 인격과 그에 따른 책임을 향한 용기,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일하며 자신의 생명력과 힘을 발휘하고자 하는 용기인 것이다. 청년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청년은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 요소, 즉 경험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의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청년기에는 자신을 향한 용기와 새로운 것으로 과감히 나아가는 모험심이 기존의 것을 따르며 타인의 경험을 이용하는 태도와 함께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과르디니는 이러한 방식으로 각 시기의 지배적인 가치형상을 기술하고, 그로부터 윤리적 과제와 위기를 이끌어내며, 그 위기의 극복과 함께 다음 시기가 형성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완성된 삶을 향한 여정인 것이다. 이 여정의 최고 절정은 노년과 고령의 삶이다. 가장 품위 있게 그 의미가 부각되는 것도 이 시기의 삶이다. 과르디니는 노년의 위기를 물러남의 위기, 끝이 있다는 사실이 원초적이고도 직접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덧없음이 노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늙어감과 생이 끝나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끝을 받아들임으로써 삶 전체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매우 고상한 태도와 가치들이 실현될 수 있고, 지혜로운 인간이라는 삶의 형상을 이룰 수 있다. 

  삶의 끝도 역시 삶이다. 과르디니가 이 책에서 가장 의미 있게 되살려 놓는 것은 노령 다음, 고령의 시기이다. 그는 ‘죽음’을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임으로써 이 시기를 삶의 완성기로 그리고 있다. 과르디니는 고령의 인간에게서도 가치형상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과거에 사람들이 죽음의 기술이라 불렀던 것, 즉 죽음을 향해 올바르게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삶을 오직 청춘의 활기가 넘치는 상태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죽음은 부정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여졌고, 보이지 않게 긍정적 가치의 선상에서 치워져 버렸다. 그러다 보니 죽음은 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게 된다. 삶 자체 속으로 미리 들어와야 할 죽음의 의미는 실종되고, 죽음을 향해 다가갈 때만 얻을 수 있는 인간 삶의 중요성과 위엄이 있다는 사실이 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죽음을 영원에 대한 궁극적 결정으로 이해했기에 좋은 죽음, 복된 죽음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늙는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고, 죽음이 다가옴에 따라 실존의 근원은 드러나며,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란 공허로 해체되는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것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각자 찾고 결정해야겠지만, 신에 대한 믿음 없이 늙는 것은 좋지 않다는 과르디니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꽤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답하는 데 종교적 인식, 영원에 대한 인식은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르디니는 삶의 각 시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삶의 윤리적 과제를 완수하는 데 핵심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이야기했다. 존재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존재해야 하는 것(당위)을 만들어내기 위한 출발점이다. 완숙한 지혜에 이른 노년기에 이미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 밖에도 이 책에서는 과르디니 사상의 근저에 깔려 있는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자주 나타난다. 가령 그는 여건이 되는데도 노인을 양로원에 보내는 것은 나치 시대의 우생학자들이 저지른 악행과 같은 짓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그는 출산을 용이하게 해주는 기술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아이에 대한 지나친 인위성의 개입에 반대한다. 그리고 국가가 아이를 맡아 국가적 목적에 동원하고 교육하는 것은 최악이라 말한다. 특히 그는 남녀평등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보인다. 그는 이 시대의 불행한 경향 가운데 하나는 성 차이를 없애려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타래를 잘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남녀의 차이를 없애려는 경향이 실제로는 여성의 고유한 특성을 파괴하여 오히려 더욱 철저하게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남녀 간 권리의 균형이라는 목적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유한 특성을 펼쳐 나갈 수 있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한다. 오직 고유함 속에 의미가 있고 오직 고유함 속에서만 진정한 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젠더에 대한 그의 이러한 입장은 나중에 이반 일리치에 의해 자세하게 논구되었다(『Gender』). 과르디니의 이러한 경향은 자연에 대해서든 인간에 대해서든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균질화한 후 그 안에서 평등을 추구하는 근대의 환원주의에 반대하는 맥락에 있다. 이러한 그의 이러한 입장은 기술과 제도에 의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근대의 경향에 대한 근원적 회의에 근거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과르디니는 국가나 제도, 기술의 힘을 가능한 한 배제한 채 하나의 고유한 생명체로서의 탄생과 성장, 죽음의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생명체로 발돋움하는 개체 인간의 삶을 하나의 완성된 삶을 향하여 가는 여정으로 기술하고 있다.


지지봄봄
17호 넘봄 | 서평
때 묻지 않은 삶의 근원으로, 다시 처음처럼
교육전문 격월간지 『처음처럼』과 『야생의 교육』
김종길 / 경기문화재단 문화재생팀장

 2016년 첫 「지지봄봄」을 준비하면서 저는 우리가 알았으나 잊었던 자료 하나를 소개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편집회의 때 교육전문 격월간지 『처음처럼』(내일을 여는 책 펴냄)을 꺼내 들었죠. 그런데 이 책을 아는 이가 생각보다 적더군요. 김보성 성공회대 외래교수님을 편집위원장으로 모시고 다시 17호 좌담회 할 때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 잡지의 상징과 의미를 되짚기 시작했어요. 특히 이병곤 편집위원(경기도교육연구원 전문연구원)께서는 황덕명 선생님(당시 『처음처럼』발행인)께 전화를 걸어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 책의 기증을 요청하시기도 하셨죠. 아주 반가운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가슴 어딘가로 어떤 상실감 같은 것이 싸하게 몰려오더군요. 사실 『처음처럼』은 이미 폐간되어 이제 발행되지 않기 때문이었고, 그 뿐만 아니라 과월호조차 구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에요. 다소 역설적일지 모르겠으나 과월호를 구하기 힘들다는 것은 그 책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이 책을 헌책방에 내놓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거예요.

 
 『처음처럼』은 1997년 5월에 창간됐어요. 작은 잡지 하나가 탄생한 것이 정말 큰 대수였을까요? 이 잡지의 의미가 당시에도 매우 컸던 모양인지 경향신문에 단신이 실렸죠. 그 기사 내용이 이래요. 

  “교육전문 출판사 ‘내일을 여는 책’이 격월간지 『처음처럼』을 창간했다. 강선보(고려대), 정유성(서강대) 교수, 이상헌(광주 광산중학교), 이치석(서울 용두초등학교), 조재도(예산 고덕중학교) 교사 등이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처음처럼』은 새로운 삶과 교육을 열어가는 연대와 실천의 장을 표방하고 있다.”
(경향신문, 1997.5.16.)

 창간호를 본 적이 없어서 창간 당시 기획위원들이 어떤 맥락에서 이 잡지를 기획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분들의 선언적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려워요. 1997년이면 나라 경제가 무척 힘들어지기 시작하던 때였고 급기야는 IMF구제금융이 시작됐잖아요. 그런데 창간되자마자 이 책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아주 큰 주목을 받게 되었어요.

 그 해 한겨레신문 7월 22일자는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고병헌 성공회대 교수의 인터뷰를 싣고 있어요. 인터뷰어 김창금 기자는 “우리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지난 5월 창간한 격월간 『처음처럼』(내일을 여는 책 펴냄)이 교육계와 학부모들 사이에 잔잔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참된 교육은 무엇인지, 교사의 참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을 되새겨 보게 하기 때문”이라면서 왜 만들었고 누가 만들고 있는지 묻기 시작하죠. 인터뷰 내용이 많지 않으니 그 전문을 인용할게요.



『처음처럼』을 만든 이유는?

 입시, 경쟁 위주의 우리 교육을 함께 걱정하면서, 바람직한 교육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잡지를 꾸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현직 대학 교수와 교사들이 기획위원으로 참가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삶의 주제들, 예를 들어 대안적인 삶, 환경과 생태, 인권, 생명, 평화, 통일, 문명, 종교, 성평등 같은 주제들에 접근해 ‘삶의 문제’와 ‘교육의 문제’가 풍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최근 10대들이 만든 포르노 비디오 제작은 우리 교육의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는데.

 교실은 한 사회의 문제가 집적돼 나타나는 작은 공간이다. 고도 소비사회가 돈을 위한 폭력을 일상화시키고 개인을 고립시켰다. 여기에 학벌과 학력주의, 입시 경재의 교육 풍토는 학생들에게 폭력을 폭력으로, 타락을 타락으로 느끼지 못하게 하고 있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중단된 의사 소통구조가 시급히 회복돼야 한다.


대안교육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대안교육의 스펙트럼은 교육혁명부터 부분적 개혁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빠른 시간 안에 지식을 주입시키고, 학생을 선발하고 통제하는 데만 익숙한 기존 교육제도를 철폐하자는 데에는 공통적이다. 대안교육은 이런 차원에서 열린 교육을 바탕으로 학생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는 다원사회에서도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교육을 맡게 될 것이다. 


대안학교의 전망은 어떤가?

 거창고등학교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의 경우 30~4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최근에는 내년 설립목표로 6곳의 대안학교가 교육부의 재정지원을 확보했다.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대안학교 설립이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는 경우도 있지만 기존 교육제도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교육부가 초등학교의 열린 교육 지원이나 ‘탈규제 학교’를 강조하는 것은 한 사례다.


대안학교가 현실 공교육의 외곽에서 겉돌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대안학교가 현실의 제도교육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 없이 극소수의 학생을 위한 별도의 학교가 된다면 엘리트 교육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대안교육의 이념이 공교육 기관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장교사, 교육이론가, 학부모 등이 대안 교과서나 새로운 교육방식 모형을 적극 개발해야 한다.


21세기 교육의 형태는?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 배운 사람이 더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문자에 대한 지식은 독이 되기 쉽다. 휴머니즘을 강화하는 교육을 통해 ‘사회적 문맹’을 퇴치해야 한다.

*인터뷰이 고병헌 성공회대 교수, 인터뷰어 김창금 한겨레신문 기자, 1997.7.22.





 『처음처럼』의 발행인은 황덕명 선생님이었어요. 선생님은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송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에 고려대에 입학해서 교육학과 사학을 공부하셨죠. 1988년에 도서출판 ‘푸른나무’에 들어가 출판일을 배우셨고, 1993년에 도서출판 ‘내일을 여는 책’을 세웠어요. 선생께서는 ‘새로운 삶과 교육을 생각하는’ 잡지를 위해 1997년에『처음처럼』을 창간했고, 1999년부터는 강화도로 삶터를 옮긴 뒤 ‘도장리 생활학교’와 ‘도장리 마을 도서관’을 실험하기도 했어요. 2006년부터는 ‘산마을고등학교’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사상, 시사토론, 인문학, 생태농업’를 함께 공부한 뒤, 현재는 강원도 홍천의 해밀학교에서 벗들과 함께 ‘야생의 교사’로 살고 계세요.
 
 제 서재에는 딱 한 권의 『처음처럼』이 있어요. 10년 전, 민들레출판사의 김경옥 주간께서 책의 리뷰를 위해 빌려주셨는데 어찌어찌 시간이 지나서 돌려드리지 못하고 그만 제 서재에 꽂혀 때때로 빛을 발하고 있지요. 오래전의 책이지만 문화예술교육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헌책방을 통해서라도 구해 읽기를 권해요. 『처음처럼』은 단지 대안교육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 교육의 철학과 정신은 물론이요,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론과 사례들에 대해 꼼꼼히 보여주고 있죠. 매 호마다 기획위원들이 어떻게 책을 만들었는지 정말이지 우리 교육의 미래를 위해 어떤 사유를 공유했는지를 살필 수 있답니다. 황덕명 선생께서는 이 잡지가 추구하는 철학을 직접 실천하기 위해 강화도로 거처를 옮겨 스스로 농사지으며 살았었죠. 

 단행본의 서평이 아니어서 책의 내용 하나하나를 따져 평하기 어려워 황덕명 선생님의 책 한 권을 따로 소개할까 해요. 지난 해 가을, 선생께서는 그 간의 체험과 교육적의 사유를 『야생의 교육』(삶창)으로 묶어 내셨죠. 오랫동안 직접 벗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스스로 깨닫고 의문한 것들을 쓴 글들이어서 그 진정성의 무게가 작지 않아요. 




 선생께서는 ‘학생’을 그 자체로 완성된 존재로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교사’란 학생들과 그 시기를 사는데 각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존재일 뿐이라고 말하죠. 교사는 그저 조금 먼저 태어난, 길을 안내하는 존재이지 학생이라는 미완성의 존재를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선생의 말씀을 새겨 볼까요?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스스로 병아리로 변화하려는, 곧 한 차원 다르게 성장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선생이 한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의 사람들에게 선생은 단지 징그러운 존재로 전락할 것이오. 선생은 벗들이 모르는 지식을 가르쳐주는 존재가 아니라 벗들이 가려는 길에 빗자루질을 해 주는 사람이란 말이오. 벗들이 자기 길을 가지 않으면 선생은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란 말이오. 또 황구는 이런 생각도 갖고 있소. 배움은 교실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오. 오히려 학교 밖에서 만나는 다양한 경험과 스스로 자신을 가꾸는 노력 속에 진정한 자기 배움이 이루어지는 것이오. 그리고 벗들끼리 서로 나누는 속에서 제대로 된 배움이 싹튼다는 것이오. 벗들이 같이, 함께 배운다는 진리를 깨닫지 않으면 산마을에서의 배움은 사상누각이 될 공산이 매우 크다는 걸 명심하오.

-「교사의 삶이 교육의 처음이다」 중에서



 선생께서는 동네 개 이름을 닮은 별명 ‘황구’를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요. 벗들과의 장벽을 없애는 데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겠죠. 『야생의 교육』의 부제는 ‘텃밭 수업’이에요. 선생께서는 텃밭을 가꾸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글로 썼고 그 그들은 짧지만 사유가 깊어서 어떤 철학적 삶의 요체를 보게 만들어요. 몸을 움직인다는 것이 생각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밭을 경작하는 것이 또한 글쓰기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니까요. 선생의 글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칠게요.


 사람은 소처럼 부려먹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 가치를 사는 존엄한 존재이다. 그 출발은 자기 삶을 스스로 온전히 사랑하는 일에서 일어난다.

-「교사의 삶이 교육의 처음이다」중에서


 좋은 직장을 구하고, 명예를 얻고, 부를 얻으면 행복한 삶인가? 이렇게 하기 위해 젊음을 다 소진하고, 친구를 잃고, 삶터를 파괴해야 한다면 이게 진정한 삶인가? 삶의 가치를 묻지 않는 지식은 죽은 것이다. 학교든 어디든 가르침과 배움이 있는 곳이라면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묻고 또 묻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제 내 아이에게 던지는 “넌 커서 뭐가 될래?”는 삶의 진정한 가치를 묻는 격려와 조언이 돼야 할 것이다.

- 「삶의 가치를 배우는 교육」중에서


 책을 읽자고 소리치지 말고 어른들이 독서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벗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겁니다. 어른들이 어떤 책을 보는지를, 독서에 임하는 태도 등을 벗들이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어른들의 서재로 벗들을 초대하여 손때 묻은 책의 사연을 나누어 보면 당연 효과가 있을 것이고, 공공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도서목록이나 서점에서 구입한 책 목록을 보여주면서 벗들을 협박(?)해야 합니다.

- 「몸으로 함께 공부하는 곳, 산마을」중에서


지지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