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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가봄 | 현장스케치
꿈다락 다시보기(영상비평)
주성진 / 문화용역


#1. 영상비평의 시작 - 호크마댄스시어터


 아직도 호크마댄스시어터의 수업을 처음 보았던 날의 충격이 기억에 생생하다. 세 시간 동안 수업을 지켜보아도 누가 주강사인지, 보조강사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유기적으로 수업을 이끌어 나가는 선생님들, 수업 밖에 마치 연극의 연출가처럼 존재하며 수업을 조율하는 기획자, 힘들면 조금 쉬어도 된다고 해도 계속 뛰어노는 아이들. 수업이자 공연이고 또 축제와 같았다. 준비 과정을 물었을 때 매주 수업 전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여 리뷰하고, 선생님들과 공유할 부분을 추려 주중에 모여 함께 본 뒤, 다음 수업을 거의 실시간으로 리허설 한다고 담담히 말하던 기획자 진윤희 선생님.

 여러 자리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중향(?)평준화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 될 때 마다, 호크마댄스시어터의 수업 장면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분명 지금의 문화예술교육 지원 체계(교육 프로그램의 연구개발보다 ‘교육 서비스 제공’에 집중된 지원)에서, 다른 단체들에게 호크마댄스시어터와 같은 방법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시간당 43,000원을 받는 선생님들께 그 두세 배에 달하는 보상을 받고 하루 수업을 지켜보고, 구조적인 문제를 함께 한탄하며 응원과 지지를 전하거나, 짧은 관찰에 의한 몇 마디 코멘트를 전하는 관행적인 모니터링 혹은 컨설팅 구조에 대한 회의도 해가 갈수록 깊어갔다.

 그런 마음을 담아 호크마댄스시어터의 리뷰 과정을 다른 문화예술교육 단체들이 한 번씩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꿈다락 토요문화학교에서 제공했으면 한다는 의견을 작년 말 한 지면을 통해 전했었다. 그런데, 올해 초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선생님들이 찾아와 말했다.
“영상비평 진행 예산을 마련했어요!”

 낯설었다. 매번 모니터링이나 컨설팅이란 이름으로 참여한 사업들이 끝날 때마다 각 기관들에 ‘제언’이라는 것을 남기지만, 그런 제언이 현실화된 적이 워낙 없었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상상도 머릿속에 사라진 지 오래였기에 낯설었다. 생각해 볼 만한 의견이지만 내년도 사업 계획이 10월에 이미 결정되어서(그러면 12월에 제언은 왜 받는 것일까?)라던가, 기존의 방식을 바꾸려면 타당한 근거가 필요하다는 답변이 훨씬 일반적이고 익숙한 일이었다.

#2. 영상비평 형식의 준비 - ‘미운우리새끼’는 얼마나 위대한 프로그램인가!

 먼저 관찰카메라를 통해 촬영된 영상을 스튜디오에서 보면서 대화하는 형태를 생각했다. ‘우리 결혼했어요’ 나 ‘미운우리새끼’와 같은 방식으로 수업을 다각도로 촬영해서 편집하고, 함께 모여 보면서 이야기 나누는 방식이었다. 비평보다 수다에 가까운 자리를 상상했다.

 꿈다락 토요문화학교와 같은 역동적인 수업 현장에서 모니터링을 진행하는 한 명의 시선으로 수업을 관찰하고 분석한다는 것에는 당연히 많은 제약이 있다. 네다섯 명의 선생님들이 이십여 명의 아이들과 갖가지 상호작용을 하고, 때로는 아예 분리된 공간에서 모둠별로 수업이 진행되기도 한다. 모든 선생님의 발언과 학생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교실 한구석에서 보조강사 선생님과 수업을 거부하는 학생이 하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또 수업이 끝나고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선생님들과 모니터링 참여자 각각의 시선과 기억은 늘 다르다.

 처음에는 구석구석 카메라를 설치하고, 모든 선생님에게 무선 마이크를 착용시키고, 별도의 마이크로 학생들의 음성을 담는 원대한 기획으로 출발하였다. 수업에 대한 간섭 문제와 예산 문제 때문에 3개의 카메라로 수업을 촬영하여 편집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대신 문화예술교육을 직접 진행한 경험이 있는 촬영팀을 섭외하고, 주목할 부분에 대해 사전에 이야기 나누고 촬영을 진행해 주어진 여건의 제약을 극복해 보고자 했다. 

 대부분의 현장에서 아이들이 카메라를 의식해 평소보다 조금 과장된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 촬영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편집은 다른 문제였다. 세 시간 동안 세 대의 카메라로, 각각 다수의 커트로 촬영된 영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결과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촬영팀이 일주일 밤을 지새운 덕에 영상비평에 참여한 일곱 개 수업에 대해 아래와 같은 화면으로 전체 수업의 흐름과 개별적인 상호 작용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영상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최종 편집본이 완성된 것은 영상비평이 이루어지기 사흘 전 이었고, 영상비평에 패널로 참여한 선생님들께 이틀 동안 12시간 분량의 영상을 보고 분석하여 참여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청을 드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널 선생님들은 영상을 면밀하게 분석하였을 뿐 아니라, 아래와 같은 양식으로 논의할 내용을 꼼꼼하게 정리해 주셨다.


#3. 영상비평 내용의 준비 - 누가, 어디까지 도울 수 있는가?

 문화예술교육 분야에 영상비평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대학에서 최근 일반화된 수업 컨설팅을 중심으로 초반 리서치가 시작되었다. 서울대학교 교수학습센터의 민혜리 교수님, HD행복연구소의 조벽 교수님과 자문회의를 진행하였다.

 이 단계에서 가장 고민이 되었던 부분은 문화예술교육은 일반적인 교육과정과 비교할 때 교수법과 수업 내용이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물리학을 강의하는 교수에게 교수법에 대해 비평을 했을 때, 그것은 대부분 마이크로 티칭, 즉 커뮤니케이션 스킬 중심의 문제로 전달된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의 경우 그것이 교수자의 교육 철학을 포함한 보다 포괄적인 비평으로 연결될 여지가 많고, 때에 따라서는 교수자의 삶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따라서 비평에 대한 거부감과 위험도 높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외부 전문가와 함께 교수법 컨설팅을 중심으로 진행할 것인가, 아니면 문화예술교육 전문가와 함께 더욱 광범위한 내용을 다룰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였지만 뚜렷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일종의 파일럿 프로그램이라는 성격에 맞추어 두 가지 모두를 실험해 보기로 하였고, 문화예술교육 전문가를 중심으로 1회, 수업컨설팅 전문가를 중심으로 1회의 영상비평을 진행하게 되었다.

#4. 영상비평의 가능성 -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던 것들

첫눈이 내리던 11월 20일, 꿈다락 토요문화학교의 첫 영상비평이 진행되었다.

 영상은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영상은 우리가 시간을 압축하여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3시간의 수업 동안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편집하여 관찰함으로써, 특정한 행위나 현상의 원인을 깊이 있게 고민할 수 있었다. 먼저 한 프로그램에서 보조강사로 참여한 선생님들이 공통으로 손을 앞에 모은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 지속적으로 관찰되었다. 이러한 장면들을 모아보고 논의하는 과정을 통해 이것이 개인의 성격이나 습관이 아닌, 주강사-보조강사 간의 역할 설계의 문제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장의 흐름 속에서는 전반적으로 짜임새 있게 잘 구성되었다고만 생각되었던 한 프로그램의 경우 전체 수업을 빠르게 압축해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한 차시 안에 들어있는 꼭지가 너무 많아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표현할지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표현을 요구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결론을 함께 내릴 수 있었다.

 영상은 공간을 보다 객관적으로 인식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래 사진은 맥케이펄스의 프로그램에서 수업을 마무리하는 장면이다. 수업 과정에서는 학생들이 전체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는데, 수업의 시작과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강사가 사진과 같이 분명하게 선생님의 공간을 분리하여 설정하고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더욱 넓은 시야와 다양한 각도로 공간을 관찰하면서, 공간의 활용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영상은 우리가 작은 부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래의 사진처럼 수업의 주된 공간 밖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 짧은 순간 선생님들의 시야 밖에서 어린 학생이 찻길로 접근하거나, 교실 뒤편에서 성적인 내용의 노래를 부르는 학생과 주변 친구들의 동조과정, 선생님을 때리려는 시도 같은 작은 장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수업 전후 장면들이 충분히 기록되어, 수업 이외의 부분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을 배웅하는 장면이 많이 언급되었는데, 많은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이 다 떠나기 전에 뒷정리가 시작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외부자의 지적이 아니라 화면을 통해 스스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의 폭도 넓어졌다.

 
 영상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공간을 함께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아래 사진들은 영상 비평에 참여한 세 단체의 수업 모습이다. 이렇게 다른 환경의 수업 공간을 함께 보는 것만으로도 각각의 단체들은 당연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주어진 공간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고, 타 단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서로의 공간에 대한 상상을 나누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영상비평 참여 단체 중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사업에 4년째 참여하고 있는 단체가 두 단체 있었는데, 이 두 단체의 선생님들도 서로의 수업 장면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하였다. 모든 단체가 토요일에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서로의 수업을 직접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영상비평은 ‘도대체 다른 단체는 어떻게 수업을 진행할까?’ 하는 오래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통해 조금은 공허하게 진행되어온 단체 간 네트워크 활동에도 깊이를 더해 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상은 우리가 혼자서 당연하게 보아오던 장면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관찰하고 함께 이야기 나눌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5. 영상비평 1.0을 위하여 - 영상비평의 나의 이불 킥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특히 자신의 부족함이 담겨있는 과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에게 꿈다락 다시보기(영상비평)의 기획 과정과 실행 결과를 돌아보고 글로 정리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고통을 통해 영상비평에 참여해주신 단체 선생님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고, 다시금 죄송스러웠다. ‘왜 단체들을 불러 모아 모욕을 주느냐?’라는 비난 비평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글을 마무리하는 이 순간까지 찾지 못했다. 지원사업 구조 아래서 참여단체가 모니터링 위원 혹은 컨설턴트의 의견을 비난이 아닌 비평으로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돌아보면 반드시 거쳤어야 할 몇 가지 과정을 일정 관리를 철저히 하지 못 해 생략하게 되었다. 먼저 참여 단체가 자신의 프로그램이 촬영된 영상을 미리 보고 영상비평에 참석할 기회를 꼭 제공했어야 했다. 영상을 면밀하게 뜯어보고 정리해온 패널과 영상을 미리 확인하지 못하고 참여한 단체 선생님의 대면은, 애초에 수평적이지 못한 정치적 관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단체가 미리 영상을 확인하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장면들을 설명할 수 있는 사전 준비의 기회가 제공되었어야 했다. 전체 프로그램의 맥락을 전달하고 그 안에서 해당 수업을 비평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했다. 참여 패널들이 영상을 보고 내용을 미리 조율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형식보다 내용에 훨씬 더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문화예술교육에 영상비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험 많은 단체들에게는 관성을 깰 수 있는 계기가, 새로 시작하는 단체들에게는 문화예술교육과 일반 교육이 갖는 최소공약수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영상비평이 문화예술교육의 중향평준화의 흐름에 새로운 물꼬를 틀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앞서 언급한 올해의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아야 할 것이고, 영상의 기술적인 부분도 상당 부분 보완되어야 할 것이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영상비평 모두에 진행되었던 교수법 강의에 참여 단체 선생님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교수법에 대한 지식은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학습보다는 현장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자주 목격한다. 또한, 많은 경우 이 경험은 문화예술교육의 경험뿐만 아니라, 자신의 예술 장르에서의 경험과 육아의 경험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이 이론 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는 않지만, 지원사업의 구조 안에 현장의 경험은 이미 전제된 만큼 교수법에 대한 이론적 교육 프로그램이 보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올해 많은 분의 용기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이 쉽지 않은 실험에서 확인된 가능성과 부족함이 영상비평 1.0의 씨앗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지봄봄
22호 가봄 | 현장스케치
지아정원의 변명
이현정 / 지아정원


※ 지아정원은 황대원 선생님(예술비평가)께 현재 진행하고 있는 ‘우리는 가족이야, 아니야?’라는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에 대해 두 번의 비평을 부탁드렸습니다. 그 중 첫 번째 글이 도착했고 그 글은 저희가 하는 일과 의도했던 것 사이의 거리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목적지와 현재의 위치가 요원해진 지금, 막간 비평에서 보이는 우려와 의구심에 대한 대답으로 실패의 경험을 써내려가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왜 내가 이 프로젝트에 비평을 써야 하느냐고 물으셨지요. 예술 프로젝트라면 몰라도 굳이 교육 프로그램에 예술 비평이 필요하냐고 말입니다. 떠올려 보면 처음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을 때는 저희 안에서 예술과 교육이라는 분야가 분리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누군가가 우리의 일을 외부의 시선으로 지켜봐주길 바랐고 그래서 이전에 인연(예술 프로젝트에 대한 비평을 써주셨던)이 있었던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스스로 하던 일들의 장르가 바뀐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순진함이 지아정원의 동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처음 모인 사람들이 시각예술 분야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계획보다는 순간순간의 판단과 손에 잡히는 것들로 작업을 했었고 오히려 의외의 결과물들을 만들어 냈었죠. 예술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꽤 괜찮은 작업이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일들이 주위 사람들에게도 전달되길 바랐습니다. 그런 내적 성취가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외부로 확장되길 바랐습니다. 
 
 한데 교육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뭔가 어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진행했던 교육프로그램인 ‘타인의 자리’, 그 첫 수업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나름의 고민과 노력으로 ‘쿵푸팬더로 보는 교육론’이라는 피피티를 준비했었죠. 결과는 아시는 대로입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기 바빴고 그나마 첫 만남이라는 긴장감이 지루한 시간을 견디게 했습니다. 불을 꺼놓은 탓에 부끄러운 표정들을 감추기에는 좋았습니다. 그 수업은 교육이라는 이름의 전형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강사들은 무엇인가 의도해야 하고 그것을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일정한 수업시간 안에 일정한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일종의 교육적 불문율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무리한(예기치 못한) 과정들보다는 무난한(결과가 뻔한) 것들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원하던 바와는 반대로 무난한 과정이 무리하게 주입되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선생님께 연락드린 이유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교육과 예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혹은 두 배로 노력한다면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한 마리 사자와 한 마리 토끼를 한 우리 안에 집어넣는 일이었습니다. 사자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힘들어하거나 행여 토끼를 잡아먹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예술적 감수성은 교육적 억압이 보이는 순간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대로 둔다면 두려움을 못 이긴 토끼가 죽어 나갈 운명이었습니다. 이것이 교육이나 공동체 활동에 기반을 둔 시각이 아닌 선생님의 관점, 예술 비평의 시각으로 바라봐주길 부탁드린 이유입니다. 배부른 사자 곁에 토끼 가죽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건 아닌지, 이미 토끼가 달아나고 없는 건 아닌지 살펴봐 주십사하고 말입니다. 
 
 현장을 방문해 수업 내용을 보셨을 때의 말씀도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는 가족이야, 아니야?’가 주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만들기 체험들과 어떤 면에서 다른지 혹은 그 이상의 것들이 있는지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물으셨습니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앞니에 낀 고춧가루 같았습니다. 더는 웃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서로의 잘못을 캐묻고 서로를 탓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보셨던 수업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인형과 의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둘의 대화를 쓰고 발표하는 자리였죠. 시각적으로 초라한 것들이었습니다. 인형과 의자의 크기가 발표한 내용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시각과 청각이 따로 놀고 있었습니다. 발표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온전히 몰입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작년 ‘타인의 자리’에서 했던 6주간의 내용을 2주로 압축한 수업이었습니다. 인형을 만드는 시간도 그 인형의 의자를 만드는 시간도 반의반밖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인형과 의자의 크기도 반의반 토막이 나버렸습니다. 작년의 과정에 여러 내용을 덧붙인 결과였습니다. 하고 싶은 게 늘어난 만큼 해야 할 일들도 늘어났습니다. 한 과목만 파느라 시험 전체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지금 주위에는 수많은 체험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캠핑, 주말농장, 학원 활동 그리고 미술관, 도서관과 같은 공공기관의 프로그램 등 굳이 지아정원이 아니어도 갈 곳은 많습니다. 그러니 이것들과 경쟁해야 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부르는 것은 교육을 하는 데 있어 일희일비하지 말고 백 년을 엮어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결국, 교육의 진정성은 짧게는 한 번의 수업이 앞뒤의 그것들과 얼마만큼 연결되어 있느냐로, 길게는 지금의 행위를 20년 전 그리고 20년 후의 일들과 어떻게 엮어내느냐로 판가름 날 것입니다. 그날의 수업은 여느 체험프로그램과 다를 바 없는 한낱 에피소드에 불과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의 에피소드가 배경을 만들고 뒤의 에피소드가 더 큰 사건으로 전개될 때 파편들은 서로를 부여잡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듭니다. 지금의 모자란 시각적 자극이 이후의 일들에 복선으로 비치길 바랄 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기획의 취지인 ‘낯선 가족관계에 이름을 부여하는 시도는 어디에 있나’라는 질문을 주셨습니다. 또 참여자들이 그런 의도와는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셨습니다. 사실 기획의 의도가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 생각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그날의 수업을 해치우기 바빴습니다. 하나의 수업을 준비하고 하나의 수업을 마치면 금세 다음 수업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처음 짰던 내용과 일정에 끌려다니고 있었습니다. 일주일이 참으로 빨리 지나갔습니다. 이런 질문을 통해서야 다시금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3분의 2 정도의 여정이 지난 지금, 처음의 목적지와 지금의 위치를 곱씹어봅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작년부터 함께 했던 한 아이의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우리는 가족이야, 아니야?”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직은 아빠가 아닌 삼촌과 살고 있었고 실제 아빠와는 주기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러니 아이에게는 삼촌을 가족으로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다 아이는 천진난만함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게 됩니다. 주말에 잘 놀아주는 삼촌에게 ‘주말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 후 아이는 삼촌을 (주말)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기획의 내용은 이 아이의 경험을 장황하게 써 내려간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참여자가 이런 내용과 부합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참여자들이 설정한 대상마저 친족 관계가 대부분입니다. 상세한 가족사를 듣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이 자리의 목적은 아니니 더는 캐물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첫 자리에서 함께 기획서의 내용을 읽어봤을 때처럼 “뭔지 모르지만 좋은 거 같다.”라는 말과 계속 참여해 주시는 열의 정도면 기획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아이가 학교 친구들에게는 삼촌과 함께 산다는 말을 못 하지만 지아정원의 친구들에게는 스스럼없이 말한다고 합니다. ‘낯선 가족관계에 이름을 부여하는 시도’를 ‘낯선 가족관계를 스스럼없이 인정하는 태도’로 변주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낯선 것들을 서로가 인정할 만한 일, 있을 법한 일로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기획의 의도는 참여자들을 만나며 낯선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낯선 이름이 통용되는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또 낯선 가족관계를 들고 나온 참여자분들이 적다는 것도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평범하게 여겼던 가족 관계가 낯설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부부 간의 또는 자식과 부모 간의 역할과 의미부여가 가정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마다 제각각이었습니다. “당연한 거 아냐?”라는 물음에 “당연한 게 어딨냐?”고 되묻습니다. 오히려 이혼과 같은 불편한 상황에 명백한 동의가 따라붙곤 합니다. 서로의 속내를 알아갈수록 가족이라는 이름이 안전한 울타리가 아닌 아찔한 외줄타기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아줌마입니다. 지아정원을 찾는 분들도 대부분 아줌마, 아저씨들입니다. 아이들의 꿈과 노부모님들의 현실을 책임지는 사람들입니다. 꿈과 현실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닌 모드를 전환하며 부지런히 오가야 할 삶의 일부입니다. 멋진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이내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현실감각은 제자리에 멈춘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 쉴 새 없이 좌우로 휘청거리는 긴장의 연속입니다. 작은 변화에도 얼마나 많은 노력과 용기가 필요한지 서로가 알고 있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프로이트의 평전에 ‘어떤 힘의 크기를 측정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이 얼마만큼의 저항력을 이겨내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이 문장으로 지아정원의 변명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어설픈 칭찬은 고래를 병들게 할 뿐입니다. 따끔한 질문과 따뜻한 충고가 소중한 이유입니다. 선생님의 시선으로 지아정원은 더 건강한 공간이 될 것입니다. 지금의 변명과 핑계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처럼 사는 삶이 예술적 가치와 함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 전시에서 뵙겠습니다. 


※ 황대원 선생님의 글은 지아정원 홈페이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gagarden.co.kr/?p=859


지지봄봄
22호 가봄 | 현장스케치
상상력을 위한 썸띵
강지윤 / 작가


 

* 본 기록은 9월 6일부터 8일, 경기상상캠퍼스에서 진행된 문화예술교육 매개자 역량 강화 워크숍 <상상력의 징후>의 일부 과정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다. 참여자들은 네 모둠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워크숍을 경험하였고 이 글은 그 중 김월식 작가가 모더레이터의 역할을 한 모둠의 과정을 중심으로 돌아본 내용이다.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기획, 진행한 <상상력의 징후>의 목적은 예술가들이 문화예술교육자로서 역할 할 때 본인의 예술 활동과 교육 활동이 겹쳐진 영역을 발견하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김월식 작가가 안내한 워크숍은 정확하게 ‘무언가를 했다’고 말하기에 곤란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기에는 분명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던 과정이었다. 그 ‘무언가‘를 예술적 또는 교육적(혹은 둘 다 포함된) 가치로 번역해내는 것이 이 워크숍의 과정이자 결과였고, 그것을 글로 번역해 내는 것이 내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인데,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워크숍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해와 이해의 중간쯤에서 번역할 수밖에 없다.

 워크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자신의 기준과 언어를 선택하는 일이었다. 참여자들은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교육으로 번역해낼지(그 반대의 경우에도) 자신만의 언어를 고민해야 했다. 그 과정에 친절한 가이드는 없었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 말이다. ‘아래 순서에 따라 만들어보세요.’ ‘220도로 예열된 오븐에서 15분간 구워주세요.’ ‘A와 B사이에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밀어 넣어 주세요.’ ‘2-3일 정도 그늘지고 바람이 잘 드는 곳에서 건조해주세요.’

 참여자들은 뚜렷하게 그려진 안내선이 아닌 흐릿한 단서들을 따라가며 자신의 연장선을 그어나갔다. 그 중에는 참여자들이 끝까지 발견하지 못한 것도 있을 테고, 모더레이터가 의도치 않았음에도 참여자들이 발견해 낸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두들 조심스럽게 더듬거리고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어딘가에 도착했다.

 그래도 이 막연한 시간동안 일관되게 해 온 일들이 있다. 한 단어로 특정하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김월식 작가의 ‘썸띵’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빌려온다.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있는 이 ‘썸띵’은 워크숍 시간동안 ‘조몰락거리기, 목적 없이 걷기,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슬슬 톱질하기’의 방법으로 형태를 바꾸어 나타났다. 

 


썸띵 1. 조몰락거리기

 시작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천사점토였다. 혹여 한 번도 천사점토를 만져본 경험이 없는 분들은 이번 기회에 꼭 구입해 체험해보길 바란다. (김월식 작가는 교구의 혁명이라고 까지 표현했는데)가벼운 무게와 말랑말랑한 촉감도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 힘들이지 않고 만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기존의 점토는 반죽하거나 성형하기에 많은 힘이 들었지만 천사점토는 숨 쉬는 만큼의 힘으로 반죽을 조몰락거릴 수 있었다. 네 명이 둘러앉아 천사점토를 쥐자 손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성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무언가 부족한 그런 에너지, 아니 에너지라고 말하기에 턱없이 맥 빠지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손이 움직이자 이내 에너지가 그대로 점토에 전달돼 이리저리 형태를 바꾸어 나간다. 무언가를 의도하고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의도는 중간에 생겨나거나 사그라들었다. 또는 다른 것으로 변형되었다. 점토는 삐죽삐죽한 무언가였다가 납작한 것, 그러다가 다시 손가락 자국이 잔뜩 난 일그러진 덩어리가 되었다가 뽀송뽀송하고 동그란 것으로 바뀌어갔다. 머릿속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의 덩어리의 형태마다,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들이 시시각각 변한다. 머리 전체가 구름이라도 된 듯하다. 
“더운 밥 먹고 이상한 짓한다.”
김월식 작가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란다. 실없이 웃어넘길 수도 있는 농담이 또 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상상력의 영역이 넓어졌기 때문일까, 과연 고작 천사점토 때문에?

 



 

썸띵 2. 목적 없이 걷기

 다음에 한 일은 걷는 일이었다. 사실 경기상상캠퍼스에 와서 걷지 않는다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걷는 일이야 매일 한다지만 이렇게 목적 없이 걷는 일은 웬만한 여유가 있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이 워크숍의 과정 동안 자신 안에서 낯선 질문이 생겨나게 하는 매개체는 여러 가지가 있었고 천사점토와 더불어 걷기도 그 중 하나였다. 우리들은 띄엄띄엄 걷고, 잠시 눕기도 했다. 서로 어떤 질문이 던져지거나 말이 시작된 적은 있었지만 명료한 방식으로 답변이 오가거나 대화를 끝맺지는 않았다. 대신 머릿속은 나른하면서도 동시에 분주했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평소라면 터럭만큼도 떠올리지 않았을 <산을 오르는 걸음걸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같이 걷던 사람들의 머릿속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상한 생각들로 바빴으리라 생각한다. 늘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 시간을 계산하고 도착 후 처리해야 할 일들의 순서를 생각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이렇게 하릴없이 걷는 것 역시 꽤 (정신적으로)바쁜 일이라는 것에 놀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재주는 없으므로 나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생각의 꼬리 일부분을 옮겨본다.

<산을 오르는 걸음걸이>
어느 누군가는 등산을 하며 주변을 휘 둘러보는 일이 자연스러울 만큼 길에 익숙하거나 체력이 좋을지 모르겠다만 그렇지 못한 나는 산을 오를 때 그런 여유는 부릴 수가 없었다. 바위나 풀, 밖으로 드러난 나무뿌리 등에 발이 채이지 않으려면 땅을 볼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산을 오르는 일 자체는 그저 묵묵히 걷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땅을 보며 걷다보면 앞서 가는 사람의 발뒤꿈치가 눈에 들어오고, 또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의 동선을 그대로 따라가기 십상이었다. 남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언뜻 생각하기에 쉬운 길을 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앞에 가는 사람이 제대로 된 곳을 밟는지는 모를 일이고, 어쩌면 당신의 앞 사람 역시 홀린 듯이 앞선 사람의 동선을 그대로 밟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렇게 여러 사람이 밟아서 패이고 드러난 부분은 미끄럽다. 겨울철 여러 번 밟혀 다져진 얼음이 특히 그렇다. 오히려 누군가 밟지 않은 곳을 디디는 것이 훨씬 나을 때가 있다. 아직 뽀득뽀득 쌓여있는 눈을 밟는 것이, 아직 맨 땅이 드러나지 않은 길가를 밟는 것이. 


 

썸띵 3. 슬슬 톱질하기

 그렇게 느슬렁거리다 경기상상캠퍼스 목공실에 들러 마지막으로 발견한 썸띵은 톱질하기다. 톱질은 물론 육체적 노동이긴 하지만 질 좋은 톱날을 장착했다면 그저 팔이 오가는 힘을 제외하고는 별도의 노력 없이 톱질을 할 수 있다.(김월식 작가는 천사점토와 마찬가지로 도구의 혁명이라며 265날을 보여주었다.) 걷다보면 그 관성으로 걷는 것처럼 힘을 들이지 않고 하는 톱질 역시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왼발을 내딛으면 자연스레 오른발이 나가는 것처럼, 팔을 앞으로 뻗으면 뒤로 당겨지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김월식 작가는 참여자들이 간혹 불필요한 힘을 주어 톱질을 할 때에는 조급해하거나(빨리 도착하기 위해 뛰거나) 겁내지 않고(우리는 걸을 때 넘어질까 지레 겁먹지 않는다) 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었다.

 우리는 톱질을 하면서 어색함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것이 톱질에 서툰 사람들의 어색한 몸동작에서 기인했는지, 시간이 지나도 좀체 자연스러워지지 않는 워크숍의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안이 그렇듯이 둘 다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어색함과 불편함이 동의어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어수선한 대화를 요약하자니 퍽 재미가 없지만, 그 순간의 묘미를 살릴 말재간이 없으니 요점만 정리해본다. “어색함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감각적인 탐색의 경로를 찾게 만든다. 감각적 순발력으로 판단을 내리니 기존에 가지 않았던 경로를 새로이 만든다. 그러니 어색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김월식 작가의 경험에 따르면, 종종 커뮤니티아트라는 미술 씬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어색한 사람과 상황을 극복하도록 만들고, 그 과정에서 예술가의 상상력을 제한시키기도 한다. 어색함을 허용할 정도의 성숙한 커뮤니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위 ‘착한’ 예술이 나오는데 그 착하다는 말 속에는 누구도 긴장시키지 않고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그런데 그 ‘착함’은 문화예술교육을 자꾸만 키트(kit)화하여 정해진 시간 내에 누구나 동일한 결과물을 생산해내도록 만드는 제도적인 욕심과 어딘가 닮아 있지 않은가? 아주 뚜렷하고 진하게 그려져서 그 외의 흐릿한 가능성을 지워버리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울퉁불퉁함을 감내하지 못하고 편평하게 두드리려는 견고한 제도 말이다.

 물론 본 워크숍에서, 우연성과 불확정성이 얼기설기 엮인 문화예술교육이 모든 문화예술교육의 지향점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능교육이, 때로는 잘 만들어진 키트(kit)식 문화예술교육이 효과적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다. 다만 이유도 모른 채 반복되는 일을 삼가고, 잠시 멈춰 서서, 다른 방식의 질문을 허용하는 것, 그 연습을 하는 자리였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밝힌 몇 가지의 썸띵은 그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였다.    


토끼굴 속으로

 그래서 이 조몰락거리기와 걷기, 그리고 톱질하기를 통해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디인가? 썸띵에 나서기 전에 했던 일은 두 명의 참여자들이 각각 자신의 작업을 나타내는 키워드와 반대로 자신에게 필요한 키워드를 뽑는 일이었다. 그들은 각각 어색함과 위험, 싸움과 예술가의 태도(예술가다움)를 꼽았다. 그리고 김월식 작가가 제안한 일은 나머지 워크숍 시간동안 이 네 가지의 키워드를 비비는 것이었고 비비는 방식은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노골적이든, 상징적이든 혹은 무시하든. 비빔밥에 계란 후라이를 넣든 빼든, 반찬으로 나온 멸치를 추가하거나 오이를 골라내든 상관없이 비비기만 하면 비빔밥이 되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어색함이 노골적인 방식으로 비벼졌나보다. 걷기가 끝나가고 톱질하기에 도달할 무렵 참여자 중 한 명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내 앞에 손을 쑥- 내밀었는데 그 위에는 천사점토 한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응? 하며 어색하게 마주보는 나에게 어떤 설명도 없이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당황스러웠던 나는 오래 생각할 겨를 없이 주워서 들고 있던 열매를 점토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만족한 듯이 웃으며 돌아섰지만 나는 그의 요청에 내가 올바르게 응답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잠시 후에 보니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몸짓을 했고(이것을 요청이라고 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사실 그는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았다.) 그 몸짓을 나름의 방식으로 읽어낸 사람들은 그의 손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거나(-) 혹은 애써 무시(0)했다.

 그는 썸띵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일을 반복했는데, 그건 옆에서 지켜보자면 꽤나 재미있는 일이였다. 이목을 끄는 일이 아니라서 더욱 그랬다. 그 몸짓의 요청을 받아 본 사람들만이 어느 한 켠에서 그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알아챌 수 있었다. 어색하게 허둥지둥하는 사람들을 눈치 챘다는 것만으로도 경험자들은 모종의 가담을 한 기분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색하게 웃으며 무언가를 했다. 어떤 이는 더 적극적으로 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 보인 모든 반응은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만남 당시의 공기나 온도, 주변의 소음, 두 사람의 관계, 때마침 들고 있던 것들에 따라 달라질 터였다. 그리고 그 때마다 점토의 형상은 예상치 못한 것으로 변해갔다. 어색함은, 말하자면, 계산된 거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영리한 방법이었다. 제도의 틀 안에서 배운 것을 곧바로 적용할 수 없는 해석 불가능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순발력이 요구되었고, 이것은 보다 야생적인 일이었다. 낯선 상대방의 언어를 오해와 이해의 중간에서 나의 언어로 번역해내 응답하는 일. 고작 한 덩이의 천사점토를 손에 쥐고 모두가 토끼굴[각주:1]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토끼굴을 통과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다시 토끼굴을 나서는 사람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상상력의 징후>라는 3일 동안의 매개자 역량 강화 워크숍에 대한 이야기이다. 3일간의 경험의 풍경은 사실 일반적인 교육과는 매우 달랐다. 눈을 감고 더듬거리거나 맨발로 숲길을 걷거나 목적 없이 어슬렁거렸다. 3일 간의 풍경 전체가 토끼굴 안에 있는 듯했다.
 
 그렇게 3일을 보낸 후 우리가 돌아갈 곳은 토끼굴 바깥이다. 때문에 여기서 경험한 일들이 그저 꿈같이 수상한 일들로만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이것을 소화시키고 내보내야 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또한, 오늘의 참여자들이 돌아가서 만날 또 다른 교육 참여자들에게 전달해야할 숙제이기도 하다. 문화예술이 신기루 같은 이벤트가 아니게 하기 위해서 우린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함께 경험한 토끼굴 속의 일들을 어떻게 굴 바깥으로 새어나오게 할 수 있을까.” 당연하고도 놀랍게도 이 워크숍이 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워크숍의 목적이 그에 대한 힌트는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워크숍 <상상력의 징후>는 참여자 본인의 예술 활동과 교육 활동의 접점을 찾는 자리였다. 동기화라고 이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의 경우를 들자면 고정적인 수입이 점차 교육 활동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고, 작업과의 연결 고리는 미약해져 갔다. 때문에 교육 활동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고대하며 기다리는, 썩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가끔씩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즐거울 수 있을지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그냥 분리해서 생각하는 쪽이 속 편했다. 

 한편 우리가 접하는 교육 참여자들은 어떨지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참여자들, 특히 연령대가 낮으면 낮을수록 본인의 욕구와 문화예술교육이 동기화되기는 어렵다. 그 친구들은 토요일 아침에 꿈다락 토요문화학교에 오는 것보다 늦잠을 자거나 오락을 하는 것을 더 원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구십 구 퍼센트 쯤 그럴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과 하는 일이 분리되어 있는 참여자들, 아직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참여자들에게 어색함을 감내하라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기존의 것들과 다른 질문을 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런 말들은 단순히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잘 정돈된 테이블을 걷어차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친숙한 것들, 옳다고 믿었던 것들, 그래야한다고 생각한 것들과 이별하는 일을 무턱대고 아무 준비 없이 나타난 사람들에게 요청할 수는 없다.

 이 워크숍은 문화예술교육 매개자 역시 같지 않은지 묻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단단히 걷어찰 준비를 하고 있나? 내가 던지는 질문이 정말로 내가 하고 싶어서 묻는 질문인가? 단순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달자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통해 질문을 던지는 매개자가 되기 위해서, “나는 정말 이 어색함과 불편함을 감내할 정도로 진짜 나에게 궁금하고 절실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워크숍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내 흥미로운 질문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가 또 사라져갔다. 굳이 답을 내려고 애쓰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참 쉽지 않다는 생각도 한 것 같다. 그럼에도 3일간의 <상상력의 징후>에서 목격했던 것들은 편평하고 고르던 땅을 군데군데 움푹 패이도록 하는 각자의 힘이었다. 적어도 이곳에 온 사람들은 3일이라는 긴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질문의 필요를 느낀 사람들이었고, 적어도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토끼굴 하나 정도는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정답 없는 선택, 자율적인 삶의 기준, 자기 동기화 된 ‘진짜’ 질문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매개자들에게도 정답 없는 선택, 자율적인 삶의 기준, 자기 동기화 된 ‘진짜’ 질문을 허용하는 토끼굴이 자꾸만 파여지기를 바란다.   


  1.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토끼굴. 강둑에서 지루해하고 있던 앨리스는 토끼를 쫓아 울타리 밑의 토끼굴로 뛰어들었고 이상한 나라를 모험하게 된다. [본문으로]
지지봄봄
22호 가봄 | 현장스케치
지금부터 무엇도 상상하지 마세요
김은기 / 신기술소


 

‘관찰은 생각의 한 형태이고, 생각은 관찰의 한 형태이다’
『생각의 탄생』, 미셸 루트번스타인+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에코의 서재, 2007


 이 글은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3일간의 워크숍 <상상력의 징후> 관찰 기록입니다. ‘관찰은 생각의 한 형태’ 라는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개인적인 생각의 한 형태일수도 있겠네요. 눈치 채셨겠지만 시작부터 권위 있는 책의 한 구절을 제시하는 건 객관적이어야 할 기록이 지극히 주관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핑계대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시는 동안에는 무엇도 상상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상상력, 이 막연하고 두리뭉실한 단어를 탐구하고자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나요. 잠시나마 상상 따윈 집어치웁시다. 상상을 안하는 것이 상상을 하는 것보다야 훨씬 쉽지 않겠어요?

 


 “세상이 온통 지뢰밭이구나!” 어느 참여자가 워크숍 마지막 날 남긴 소감 중 일부입니다. 하루 전, 5인의 모더레이터 중 한 명이었던 임상빈 작가는 경기상상캠퍼스의 흙길을 맨발로 걷는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임상빈 작가와의 워크숍을 선택한 사람들은 반질반질 코팅이 되어 있는 2층 다사리 문화학교에서부터 양말과 신발을 벗어 들어야 했습니다. 실내 바닥은 생각보다는 매끄럽고 친절했습니다. 찰-싹찰-싹, 발바닥들이 만들어낸 리듬은 건물입구를 지나 아스팔트 바닥을 만나자 곧 사그라집니다. 낯선 감각에 약속이나 한 듯 모두의 발걸음이 더뎌지자 임상빈 작가는 말했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을 거예요.” 

 그보다 하루 전, 첫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창작자로 그리고 현장에서 문화예술교육을 담당하는 매개자로 활동하고 있는 열다섯 명 남짓의 참여자와 5인의 모더레이터가 이 기록의 배경입니다. 작업 활동과 교육 활동의 간극을 좁히고, 창작의 발단이 되는 상상력을 문화예술교육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보는 것이 워크숍의 목표라고 모더레이터 김월식 작가는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창작 직전의 작가는 어떤 징후를 가지는가....” 술을 마시다가, 잠을 자다가, 산책 하다가… 어떤 행위의 한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어떤 ‘무지개가 떠오른’ 경험은 아마도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무지개가 뜨는 시간처럼’ 은 모더레이터로 참여한 옥인컬렉티브(김화용+이정민)의 최근 퍼포먼스 제목입니다. 무지개는 분명 존재하지만 환영과도 같고 견고하지 않은 대신 실제보다 더 실제와 같은 순간의 공감을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무지개가 뜨는 시간은 어쩌면 작가의 작업언어가 매개자의 교육언어로 번역되는 지점, 상상력의 징후가 관측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모더레이터 옥정호 작가의 표현을 빌면, ‘세상을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결국 세상을 이야기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 도달하고자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씁니다. 옥정호 작가가 워크숍에서 참여자들과 함께 한 요가도 그런 방법 중의 하나죠. 요가는 정신을 수양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몸을 단련하는 수련방법입니다. 어려운 동작을 유지하며 오직 호흡에만 집중하면 의식하지 않았던 다른 차원의 정신이 또렷하게 느껴집니다. 머리가 아니라 의외로 몸을 움직이는 경험에서 생각이 시작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신발을 신고 흙길을 걸을 때, 보폭의 넓이와 속도는 어떤 감각보다는 우리가 머릿속에 미리 넣어둔 정보를 통해 조정됩니다. 이때의 걷기는 몸을 움직이는 경험보다는 머리를 굴리는 경험에 가까울 것입니다.

 


 맨발로 흙길을 걸을 때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발바닥의 촉각을 곤두세우며 끊임없이 시각적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바닥에 유리 파편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어요.” “저기 보이는 게 두더지 굴이예요.” “여기는 돌조각이 많네요. 조심하세요.” 고개를 숙인 참여자들은 저마다 맨 발바닥이 읽어낸 길의 행간을 공유하며 신중하게 한 장 한 장 걸음을 넘깁니다. 갈래 길에서 어느 방향을 선택할지는 발바닥의 감각에 달려 있습니다. 맨발로 걸어보니 내리막길은 오르막길 보다 험난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잔디에는 가시 같은 날카로운 풀이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임상빈 작가는 교육에 참여하는 아이들을 위험한 상황에 두는 게 즐겁다고 말합니다. 안된다고 찌푸리고 항의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즐거움을 느끼는 ‘교육적 마조히즘(Masochism)’, 하지만 이것의 다른 말은 ‘패배하는 것을 겪어보는 것, 즉 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로소 스스로 깨우쳤을 때,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냐고 화를 내면 성공입니다. 실패-짜증-분노-포기의 단계를 유도하지만 성공하는 아이는 꼭 있기 마련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잘하는 것에는 놀라지 않습니다. 옆 친구의 성공을 목격했을 때 집중하고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되는 것이죠.

 예술의 영역에서는 실패의 쓴맛을 본다 해도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위험과 어려움을 버리고 조심성을 취하게 되면 감각은 죽고 도구만 발전하게 됩니다. 정교한 도구에 기대 신체감각을 사용할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죠. “충실하고 복잡한 사물들의 이런 세계 앞에서, 아이는 결코 창조가가 아닌 소유자나 사용자만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아이는 세계를 창안하지 않고 단지 세계를 이용한다. 아이에게 모험도, 놀라움도, 기쁨도 없는 제스처들이 마련된다.” “게다가 이런 장난감은 매우 빨리 죽고 일단 죽으면 아이에게는 어떠한 사후의 삶도 없다” [각주:1]

 수업을 위해 잘 마련된 도구나 키트(Kit)는 롤랑바르트(Roland Barthes)가 『현대의 신화』에서 지적한대로 현실의 삶과 연결되지 않는 완성된 플라스틱 장난감과 같이 참여자를 순응시기키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키트(Kit)에 대한 언급은 자연스럽게 나쁜 예술교육에 대한 불평으로 넘어갑니다. 문화예술교육에서 도구에 대한 우려는 여러 차례 지적되어 왔습니다. 역효과를 알면서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수업의 주요 피드백이 아이가 아닌 부모와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이 책이 아이와 어른이라는 연령대가 전혀 다른 두 독자를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지닌 것과 같습니다. 

 키트(Kit) 이야기를 하면 또한 색칠공부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완성해보는 경험에 가치를 둔다면 색칠공부와 같은 기능교육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옵니다. 언제 붓을 놓을지를 아는 화가가 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데요, “예술가는 완성의 정도를 자기가 정한다.” 라는 김월식 작가의 대답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색칠공부를 선택한 자기기준, 흐리게 칠할 것인지 빈칸으로 둘 것인지를 선택하는 자기 성찰과 수행의 과정이 반드시 더불어 일어나야 하는 것이죠. 일상의 반복된 행위, 예를 들면 매일하는 빨래도 삶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성찰과 만나 예술교육이 될 수 있다고 김월식 작가는 덧붙입니다. 

 “어느 순간 나만의 식판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칸칸이 들어가는 메뉴도 다 정해져 있고 설거지도 쉬운.” 그간 해온 작업과 고민을 나누는 자리에서 한 참여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수업 기록을 남겨야 하니 카메라도 신경 쓰고 아이들이 머뭇거리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샛길로 빠져도 보고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사유에 잠기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은 이론처럼 모두가 알고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 스스로 더듬거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전에 선생님 스스로에게도 더듬거리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선생님의 뻔하지 않은 더듬거림이 바로 상상력의 징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맨발로 흙길을 더듬거리던 임상빈 작가의 워크숍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뒤늦게 말씀드리는데, 이 워크숍은 <야생을 기웃거리는 산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어딘가를 또는 누군가를 기웃거려 본 경험은 다들 한 번 이상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기울이다’ 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사전적 의미는 ‘몸이나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기울이다’ 입니다. 슬금슬금 넘겨보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요. 마음이나 몸, 둘 다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이는 것이네요. 그럼 ‘야생’이라는 단어는 어떤 감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다듬어지지 않은, 예측하기 어려운’ 느낌이 듭니다.

 


 

 임상빈 작가가 맨발로 등산을 하게 된 이유는 문화예술교육에서의 키트(Kit) 이야기와 조금 비슷한 맥락인 것 같습니다. 취미삼아 등산을 하는데 전문적인 장비도 없고 마련하기에도 부담이 되어 맨발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값비싼 등산화, 등산복 풀세트를 장착한 사람들은 산길에서 임상빈 작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의 정체가 궁금해진 몇몇은 같이 걸으며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등산화를 신은 사람과 맨발로 걷는 사람의 보폭과 속도는 다를 수밖에요. 이건 저도 참여자들과 맨발로 흙길을 걸어보고서야 알았습니다. 그 전엔 사실 맨발로 산길을 걷는 사람의 속도를 생각할 이유가 없었죠.

 신발을 신은 상대방의 속도가 자신에겐 너무 빠르게 느껴지고 과연 내 발밑의 땅은 안전한지를 끊임없이 살피면서 자연스럽게 그 전엔 할 수 없었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상상력을 위한 새로운 자극과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있죠. 맨발 등산은 다른 경험을 하고 자극을 얻는 방법론적 접근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자극과 불편함을 주는 방법을 그는 수업에서도 사용합니다. 개인적인 거리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물론 동의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육에서의 배려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따지다 목적성이 훼손된다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군요.

 느끼고 생각하는 상태로 이끌기 위해서는 시키지 않고 본인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게 중요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같이 어려움을 겪으며 기웃거리고 더듬거리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죠. 흙길에 진입한지 십분 정도 지났을까요, 바닥에 숨어있는 유리파편들 때문에 맨발을 포기한 참가자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 다른 한 명의 참가자도 신발을 신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놀이를 시작할 시점입니다. 야생은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무한한 놀이를 창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줍니다. 흙길을 더듬거리던 참가자들이 하게 될 새로운 놀이는 ‘살갗에서 살갗으로 개미 옮기기’ 입니다. 

 개미가 기어가는 느낌, 생각만 해도 간질간질 피부의 솜털이 일어나는 기분입니다. 참여자들은 먼저 허리를 숙여 땅바닥에서 개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발밑을 자세히 보니 개미가 많긴 많은데 죽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잡아 올리려 하니 이것도 역시 생각과 다르게 쉽지 않습니다. 잡힐 듯 말 듯 분명 눈앞에 보이던 개미는 어디론가 쉽게 사라져버립니다.  손끝의 속도가 개미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이 이 놀이를 터득하는 첫 번째 핵심인 것 같습니다. 느릿느릿 숲길을 걷던 참여자들은 이제 허리를 낮추고 개미 생포 놀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엇!” “앗!” “아!” 아슬아슬하게 놓친 것이 분명한 감탄사가 터져 나옵니다.

 


 한 참여자가 개미 생포에 성공했습니다. 다음 단계는 서로의 살갗에서 살갗으로 개미를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땅바닥에서 알 수 없는 높이까지 솟아오른 개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손바닥에서 팔목으로 팔뚝으로 역시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어디론가 향합니다. 다른 참여자가 개미의 이동방향을 예측하여 자기 팔을 대 봅니다. 그러나 올라타는 것 같다가 방향을 바꿔 바람처럼 뚝 떨어집니다. “하아!” 모두가 일제히 안타까운 탄성을 뱉어냅니다. 인간의 몸에서 벗어나 땅바닥에 떨어진 개미는 여전히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개미의 속도에 어느 정도 익숙해 졌을까요, 참여자들이 저마다 개미 생포에 성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살갗으로 옮기기는 여전히 쉽지 않네요. 여러 크기의 개미로 시도해본 결과, 작은 개미가 조금 느린 것이 어쩐지 어리숙해 보입니다. 이제는 작정하고 작은 개미만 잡아봅니다. 손에서 팔과 팔로, 한 명에서 다른 한 명으로 개미 옮기기도 성공입니다. 하지만 두 명 이상 이어지는가 하면 개미는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떨어지는 대신 다른 팔에 올라탈 것이라 예상했지만 개미는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거죠. 떨어지는 게 두려운 것은 인간입니다. 아니 두려움이 인간의 감각이겠죠.

 ‘살갗에서 살갗으로 개미 옮기기’ 놀이는 이쯤하고 숲속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임상빈 작가의 커피를 맛볼 시간입니다. 적정기술을 이용해 직접 제작한 버너와 즉석에서 원두를 갈아 모카포트로 추출하는 커피입니다. 펩시콜라 캔을 재활용해 만든 버너와 함께 가지고 다니는 이동식 커피 추출 세트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도 모두의 관심을 끕니다. 성능은 물론 캠핑 버너가 훨씬 좋은 듯합니다. 화력이 약하기 때문에 물이 끓고 커피가 추출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거든요. 효율성의 관점으로 보면 비효율, 크게 쓸모는 없어 보입니다. 커피 맛은 어땠을까요? 맨발로 숲길을 걷고 개미를 잡아봐야 아는 맛입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맨발의 고통과 개미 발걸음이 만든 감각의 변화와 떠오른 상상에 대해 토해 놓는 것’이 임상빈 작가의 생각이었습니다. 워크숍 계획안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역시 더듬거리고 기웃거리다보니 샛길로 빠지게 됩니다. 숨겨놓은 진짜 계획이었을까요, 참여자들은 첫날보다 더 자유롭게 각자의 문화예술교육 철학과 고민을 내어놓기 시작합니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에서 언어적 소통의 어려움, 교육자적 입장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 짜인 틀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수업을 마쳐야 하는 답답함.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결국에는 누군가 정답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끊임없이 스스로 고민하고 성찰해 나가야만 하는 근원적인 고민으로 이야기가 모아집니다.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예술가의 입장을 교육가에 무게를 둘 것인가 예술가에 무게를 둘 것인가 대한 논의를 자주 듣게 됩니다. 수업을 하는 예술가 스스로도 해보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주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도 하지요. 문화예술교육은 기본적으로 차이, 타인과 다른 나를 구분하는 것에 바탕을 둔다고 김월식 작가는 이야기 합니다. 예술가의 작업이 근본적으로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예술가의 문화예술교육이 왜 중요한지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80%는 뒷담화, 내가 처했던 상황에 대한 뒷담화‘ 지뢰밭에 이어 마지막 날 다른 참여자가 내놓은 소감입니다. 좋은 예술교육 프로그램, 좋은 교육자에 대해 가졌던 강박과 조급에 대한 뒷담화였죠. 성취에 대한 획일화된 관점은 ‘좋은’이라는 정확하지 않은 수식어를 만듭니다. ‘좋은’이라는 말은 다양성과 차이를 지워버립니다. 열 명의 참여자가 있다면 그 열 명의 참여자가 느끼는 ‘좋은’ 부분을 각자 그들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열어주는 것이 문화예술교육의 역할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 과정이 누구에게는 어색할 수도 불편할 수도, 말 그대로 ‘더운밥 먹고 하는 이상한 짓’ 일수도 있겠죠. 

 

 

 저는 사실 성실한 관찰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3일의 워크숍 기간 동안 제가 수집한 단어는 ‘번역, 어색함, 위법, 근육, 걷 기, 흙, 두더지, 오해, 야생, 위험, 도둑질, 아무말, 개미, 알, 체스, 맨발, 불편, 핑계, 궁시렁 궁시렁, 토끼굴’ 정도입니다. <상상력의 징후>는 ‘아무말대잔치’ 였습니다. 그 ‘아무말’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상상력이 아니라 확신의 징후가 드러나겠죠. 그래서 우리는 사회와 관습과 나, 시스템과 개인의 경사가 만나는 지점의-예술가에게는 ‘세상과의 불화’, 문화예술교육 매개자에게는 시스템과의 투쟁–결과의 문턱에서 토끼굴을 통해 핑계를 만듭니다. 

 이제 관찰기록을 끝내려 합니다. 글을 읽는 동안 당부 드린 대로 상상을 멈추셨나요? 그렇다면 상상력의 징후는 이제 시작입니다. 





  1. 현대의 신화, 롤랑바르트, 동문선, 1997 [본문으로]
지지봄봄
22호 가봄 | 현장스케치
안전하지 않은 상상에 대한 응원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아빠의 코 고는 소리를 녹음한다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경기문화예술교육 매개자 역량강화 워크숍 ‘상상력의 징후’ 중간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왔다. 본 워크숍은 이러한 물음들을 뜬금없이 던지면서도 과연 그것이 정말 뜬금없는 것인지 또 다시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워크숍은 교육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교육만을 위한 상상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아빠의 코 고는 소리, 그것을 녹음해보고자 마음을 먹은 누군가의 고민, 녹음의 타이밍이 어긋나버리는 상황, 이 모든 것들이 교육을 위해서 기획된 것들은 아니지만 그것이 교육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하듯이 말이다. 

 워크숍에서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 교육이 되고 무엇이 교육이 될 수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우리가 교육이라는 것을 얼마나 더 넓고 깊게 상상해볼 수 있을지가 중요했다. 또한 그 과정에 예술가의 개별 창작활동이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을지, 그 방식과 범위는 얼마나 확장될 수 있을지를 살펴보았다. 창작 안에 존재하지만 쉽게 정리될 수 없는 상상력의 징후들이 그 실험의 단서들로 작용했다. 그래서 워크숍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부지런히 산으로 가기도 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품기도 하고 제도와 행정에 대한 뒷담화로 흐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너무 부질없거나 쓸모없는 논의로 치부되지 않고 그 자체로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야기든 감각이든 그 무엇이든 더 적극적으로 산으로 가도록 내버려두기 위해, 참여자들은 맨발로 주변의 숲을 걷기도 하고, 말없이 요가를 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아빠의 코 고는 소리를 녹음한다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워크숍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더 확장해본다.

 ‘맨발로 숲을 걸으며 개미를 만나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요가를 하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복싱을 하는 것은?’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 옥상에서 볼링을 하는 것은?’
 ‘버려지는 물건들로 체스말을 만드는 것은?’
 ‘햇볕이 비추는 풍경의 일부를 오랜 시간 관찰하는 것은?’
 ‘오래된 이발소들을 찾아다니며 그 모습을 기록하는 것은?’
 .......

 ‘(      ) 하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본 워크숍은 이 빈칸에 특히 예술가의 창작에 관한 것들을 넣어보고자 했다. 워크숍의 기획의도에서 언급된, ‘예술가들이 창작을 하기 전에, 혹은 창작 중에 발생되거나 개입되는 다양한 신호나 행동, 사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빈칸을 채우고 있는 창작활동과 고민들을 안고 10여명의 예술가, 문화예술교육 실무자, 예술강사 등이 워크숍에 참여했고 5명의 모더레이터가 현장의 대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 대화는 더욱 구체적으로 흘러서, 

‘(      ) 하는 것의 (      )이 교육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이야기로 뻗어나갔다. 여기에서 두 번째 빈칸을 채우기 위해서는 예술가가 하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는 무언가 안에 잠재되어 있는 신호, 징후, 가치, 의미, 가능성을 읽어 내거나 번역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술가 스스로 그것을 해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경우, 본 워크숍에서는 모더레이터의 적극적인 개입이 작동되기도 했다. 그것은 수많은 키워드들로 나열되었고 참여자들은 다시 그 키워드들로부터 교육에 대해 상상을 시도했다.
 그래서 이것은 또 다른 질문을 만들었다. 

‘(      ) 하는 것의 (      )이 교육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은 무엇일까’

 그런데, 빈칸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고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고 해서, 과연 우리의 상상력은 확장될 수 있을까. 논의에 집중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한참 많아지고 있을 때, 예술가이자 문화예술교육 기획자이자 예술강사이기도 한, 그래서 또 한 명의 워크숍 참여자일 수 있는 내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교육현장’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만났던 ‘참여자’들이었다. 본 워크숍 현장과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교육 참여자들의 모습은 마치 평행하는 대화, 혹은 엇갈리는 외침처럼, 양쪽으로 나뉘어 허공에서 핑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참여자들이 유독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연스러웠고 다양했다. 그 다양함들을 잠시 언급해본다.

 남겨진 재료 몇 가지를 다른 사람보다 더 챙겨가고 싶은 사람,
 도화지를 가로로 놓아야 할지 세로로 놓아야 할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사람,
 타인의 이야기에 5분 이상 집중하기 힘든 사람,
 연필을 스스로 쥐기에 손 근육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
 작품을 완성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
 옆 사람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은 사람,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칭찬이 꼭 필요한 사람,
 일단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
 부모의 선택으로 수업에 참여한 사람,
 쉬고 싶은 사람,
 말을 할 수 없는 사람,
 익숙하지 않은 재료는 만지고 싶지 않은 사람,
 5분 간격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
 무엇을 하는가보다 누구와 짝을 지어 하는 지가 중요한 사람,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
 앞을 볼 수 없는 사람,
 너무 외로워서 수업 참여보다는 자기 표출에 열을 올려야하는 사람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보지 못한 사람,
 잘하지 못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
 다른 것을 하고 싶은 사람,
 ......
 
 교육현장에서 무엇을 하든 능동적이고 다채롭게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사실 소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사람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자연스러운 것은 더욱 많다. 그것은 본 워크숍 2일차에서 진행된 ‘나쁜 예술과 나쁜 예술교육에 대한 불평’ 시간에 언급된 것들과 겹치기도 한다. 제도적 한계, 행정의 경직성, 담당자나 실무자와의 의견 차이, 공간적 제약, 참여자 부모의 지나친 개입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워크숍 안에서 ‘나쁜 것’으로 전제되었지만 사실 그 나쁜 것들이 촘촘하고 복합적으로 얽힌 현장이 교육의 기본 테두리를 만들기 때문에, 어쩌면 어떤 상태, 혹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본 워크숍에서 말하는 ‘상상력’이라는 것은 이러한 자연스러운 것들을 전제하는 것일지, 혹은 자연스럽다고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은 나쁜 것들 안에서 해볼 수 있는 것들을 전제하는 것일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일반적인 문화예술교육사업을 예로 든다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고, 재료는 정해진 문구점에서만 일주일 전에 구입할 수 있고, 새로 세팅된 정산 시스템을 마스터해야하고, 교육 공간을 바꾸려면 서너 개의 서류와 승인이 필요하고, 보조강사의 인원은 부족하고, 강사나 기획자의 인건비는 10년 째 거의 오르지 않고, 그럼에도 진행하는 활동 안에서 참여자의 일부는 낮은 자존감 때문에 그 활동에 집중하기 힘들고, 몇몇 참여자는 자유로운 활동에 오히려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 자체의 ‘상태(condition)’로 두고 그것을 최대한 끌어안거나 건드리거나 혹은 그것과 부딪힐 수 있는 ‘상상’을 시도하고 있을까.

 혹은 현실의 요소나 참여자의 상황을, 예술가의 주제가 다채롭게 펼쳐지지 못하게 만드는 ‘나쁜 조건들’로 상정해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할 수 있는, 혹은 시도해야할 ‘상상’을 고민하고 있을까.

 문제점이 많다고 여기는 기존의 시스템이 견고해지고 유지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가를 우리는 들여다보고 있을까. 그것을 문제시하기 전에 존중해보려는 순간은 충분히 있었을까. 누군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버티며 지켜내고 있는 현장을, 우리의 상상력과 재미가 작동되기에는 너무 답답하거나 대안적이지 않은 것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고민들은 참여자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는데 그 차이를 만드는 기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 예술가/기획자/예술강사 등으로 불리는 사람을 A라고 칭한다면, A의 창작 주제가 타인에게도 주제화될 수 있는가, 더 구체적으로는 A라는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타인에게도 중요하게 의미화 될 수 있는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교육이라는 것을 기획하거나 실행하는 A가, 과연 자신의 창작 주제를 최우선으로 두지 않고 타인을 만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만약, A의 창작 주제가 최우선이 된다면 교육현장의 여러 요소 중에는 당연히 잘못되거나 느리거나 나쁜 것들의 범위가 넓어질 것이다. 반대로, A가 타인의 이야기나 상황을 부정적인 요소로 두지 않고 그 자체를 어떤 상태로 받아들이며 먼저 귀를 기울인다면 A의 창작 주제는 고민의 일부가 되고 심지어 재검토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본 워크숍에서 염두에 두었던 ‘상상력’ 혹은 그것의 징후는 어떤 범위에서 이루어졌을까. 이것은 참여자들 각자에게 얼마만큼의 의미로 물음을 던지고 있을까.

  질문을 좀 바꿔보려 한다. 참여자들이 워크숍 기간 중 가장 오랜 시간 집중하고 언급했던 것은 자신의 창작 주제나 그것의 변주 가능성인가, 혹은 타인과의 연결이나 소통 가능성인가.

 

 예술가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질문과 주제를 찾으며 작업을 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타인이나 사회를 바라보든 혹은 자신을 바라보든 스스로의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작업을 하기도 한다. 혹은 가라앉지 않은 채로 그저 살아내기 위해 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창작이라면 창작에서 교육으로 넘어오는 순간, 예술가는 좀 더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리드하고, 보듬고, 챙겨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타인이 예술가보다 더 마음이 힘들어보여도, 혹은 예술가의 힘든 마음과 반대되는 가치로 행복이 충만해있어도. 그런 상황에서 예술가는 만감이 교차하지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자 노력해야하는 순간도 온다. 예술가가 작품과 1:1로 만나 침묵의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파닥대는 개개인의 감정들과 제한된 시간 안에서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참여자 중 누군가가 너무 마음이 쓰여 예술가 스스로도 가만히 그 사람과 그림을 그리거나 그저 어떤 음악을 듣고 싶어도, 뭐라도 진행을 해야 할 것 같고, 다른 참여자들도 챙겨야하는 것이 교육이다. 마냥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도 없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긴 시간동안 그저 해보는 것이 쉽게 용인되지도 못한다. 모든 교육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으나 많은 교육이 그러한 상태 안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우리는 부정하기 힘들다.

 


 

 이렇게 사방으로 빽빽한 감정과 상황들 안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창작에 관한 것들을 가지고 본 워크숍에 참여했다. 그 안에는 수년간 리서치하거나 실험하고 있는 작업들과 그것이 결코 담아낼 수 없는 길고 외로운 시간들이 있었다. 그것이 그 예술가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매우 소중할 수 있는 것이 교육 현장에서 타인에게 절대 소중하지 않은 것으로 전달될 수도 있다. 예술가는 이것을 견디거나 인정할 수 있을까. 예술가는 자신의 해석언어가 재미있지만 확고하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유연해질 수 있을지가 교육, 혹은 상상의 가능성을 좌우한다. 워크숍에서 한 모더레이터는 그 확고함을 ‘뚝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혹시 그 ‘뚝심’이 타인의 반응이나 참여를 위해 남겨둘 수 있는 자리는 얼마나 있을까.


 예술가는 사회적 이슈나 사안에 대해 접근하고 그것을 자신의 작업 소재로 다루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사안을 그대로 마주하기보다 가치판단하거나 기존의 가치로 재생산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한 시선이 전제된 상태에서 교육의 언어를 찾게 되면 다양한 생각이나 입장들이(심지어 그것이 작가의 생각과 정반대라고 하더라도) 개입되고 표현되기 힘들다. 예술가는 ‘뚝심’도 있어야 하지만 그 뚝심이, 타인이 지향하는 가치와 다를 수도 있음을 언제나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워크숍에서 한 참여자가 “수업 중에 내가 어떤 의견을 말하기도 하는데, 내가 과연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위치인가 고민이 된다.”고 말한 부분도 이러한 맥락과 이어진다. 

 이렇게 끊임없이 판단을 유보하고 그 근거로 타인과 나와의 위치나 관계를 되짚어보려는 예술가의 태도는, 교육 활동에서 타인과의 공유를 위한 자리를 확보한다. 그리고 그 자리가 커질수록 각기 다른 성격, 가치관, 삶의 역사, 감각이 만나버리는 현장의 소통 가능성도,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는 범위도 커진다. 본 워크숍에서 말하는 ‘상상력의 징후’가 예술적 아이디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술가의 작업을 교육적 방법론화 하는 것 이외의 영역에 어떤 자리가 남겨져 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예술가의 견고한 작업을 여러 형태로 변형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 작업이 중요함에도 남겨둘 수 있는 소통의 ‘여지’, 그 사이의 긴장감은 착하거나 아름답기 어렵다. 교육은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장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소통들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풍성한 상상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예술가에게 상상력의 징후가 많을 수 있는 것은, 예술가가 독특한 아이디어가 넘쳐서라기보다는 남들은 쓸모없다고 여기거나 과하다고 여기는 것을 오랜 시간 해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비언어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좀 이상하기도 한 기운이 가득하다. 미련하고 부질없고 효과적이지 못한 행위와 공정도 넘쳐난다. 그럼에도, 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본 워크숍은 그것이 교육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가를 실험해보았다. 교육은 불완전한 정서와 불합리한 제도와 불편한 관계 안에서, 예민하게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3일간의 워크숍이 끝났고 나를 포함한 참여자들은 다시 누군가를 만나는 현장으로 간다. 그것은 일반적인 문화예술교육사업일 수도 있고, 지역 프로젝트의 단발성 워크숍일 수도 있고, 어떤 기관이 기획해 놓은 주말 프로그램의 일부일 수도 있고, 혹은 친구와 마주 앉은 시간일 수도 있다. 우리는 워크숍 기간 동안 부지런히 논의하고 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환기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상상하거나 조금 다른 교육을 해볼만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렇지만 워크숍에서의 경험들은 다시 어떤 현장에서 제도나 행정의 한계, 누군가의 개입이나 외로움 때문에 무력감으로 변할지 모른다. 그건 얼마나 우리를 또 힘들게 만들까.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교육, 혹은 사람간의 만남이 건강하게 살아있도록 만들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육이라고 말하는 활동 안에서 선을 넘고 불편하고 부조리한 상상이 시작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이 워크숍은 안전하지는 않더라도 바로 그러한 상상을 응원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      ) 하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빈칸에 안전하지 않은 것, 예술가의 창작보다 중요할 수 있는 것, 타인과 함께 해볼 만한 것을 얼마나 여유롭게 상상해서 채워볼 수 있을까.

* 최선영
예술가이자 창작그룹 ‘비기자’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비기자’는 무한경쟁시대에, 각기 다른 생각들이 꾸준하게 비길 수 있는 현장을 인문학적 문화예술 활동으로 만드는 창작그룹이다




지지봄봄
21호 가봄 | 현장스케치
세계-선을 만들어가는 춤 판 호크마 댄스 씨어터, “바디 토크”
백용성 / 철학자, 문화기획자

 

1

 

  땡볕 오후, 분당 정자동에 도착해 탄천을 따라 걸었다. 멀리 탄천 야외 수영장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렸다. 아파트 단시 사이 다소 한적한 빌라 촌에 자리 잡은 호크마 댄스 씨어터(이하 호크마)는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쾌적하고 밝은 느낌이었다. 올망졸망 벗어놓은 아이들의 신발이 유쾌했다.

 

  수업이 시작되고, 아이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처음 둥그렇게 둘러앉은 몸 풀기가 시작되고, 걷기, 뛰기, 뛰다 멈추기, 악수하기, 다시 움직이기, 움직이다 얼음 하기 등이 계속 이어진다. 아홉 명의 아이들과 세 선생님(조영빈, 심윤아, 김희연)은 매우 자연스럽게 몸동작을 이어나갔다. 거기에 기획자(진윤희)와 그녀가 만져주는 음악도 적절히 반응한다.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서로 접촉하며 주고-받기 식 네 개의 몸동작을 만들기,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각각 적절한 음고와 음색으로 의논하며 만들어 가기 등 단계별 참여도 자연스러웠고, 단계에서 단계로 넘어가는 부분도 매우 적절했다. 약간의 이탈과 웃음, 지나친 장난이 없지 않았지만, 그게 바로 아이-같음이 아닌가! 대략 2개월간의 만남이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만들었으리라. 

 

 

  과정을 보면서 나는 어떤 흥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활발하거나 수줍은 아이들의 모티프와 몸짓과 몸짓으로 이어지는, 점과 대점의 대위법적 전개, 무언가를 억지로 보여주려 몸의 과장이 아니라, 가벼운 리듬 자체를 즐기는 동작들, 그것은 흥이-살아나고-도약하고-이완되고-다시-이어지는 춤-판이 되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리듬이 내게도 파동으로 전파되어, 동조되는 것이었다. 그 때 관찰자는 관찰의 ‘거리’를 잃고, 묘한 참여자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지식에서의 <분리의 논리>, 일상의 <도구 논리>와 대립되는 일종의 <도취의 논리>이자 <관계의 논리>이다. 

 

  도취의 논리는 먼저 고정된 감각상태들을 마사지해, 말랑말랑하게 함으로써 시작되는 데, 그 때부터 감각상태에 묶였던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발달 심리학자인 다니엘 스턴은 그 감각을 ‘생기감응’이라고 했는데, 어쨌거나 풀린 감각은 도취적이어서 고정된 상태들보다는 올라가다, 내려가다, 응축하다, 이완되다, 서서히 나타나다, 사라지다, 폭발하다, 잠잠해지다 … 등 스스로 생기적인 과정이자 리듬 자체이다. 이 리듬을 타면서 어떤 것을 표현할 때, 그 몸은 돈 후앙의 가르침처럼 일상의 몸에서 <에너지 몸>으로 변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를 위한 에너지 몸을 만드는 것은 <훈련>의 문제라기보다는 <수련 혹은 배움>의 문제이다. <훈련>이 단순한 기술 습득에 적용되는 것이라면, <수련>은 열린 배움의 길이다. 우리가 몸짓이나 음악 혹은 미술을 활용한 수업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데, 호크마 역시 이를 훌륭히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한글을 이용한 움직임 찾기’를 워크숍이 시작되자, 선생님이 물어본다. “‘가’를 어떻게 소리내볼까요?” 아이들은 즉흥적으로 제안한다. 그러다 ‘가~’하고 낮게 시작했다가 올라갔다가 다시 낮아지는 파도 형 소리로 결정된다. “그럼, 그 소리에 어떤 몸짓을 만들어 볼까요?” 아이들은 몸을 웨이브 댄스처럼 표현하는 것을 택한다. (어떤 아이는 물로 얼음처럼 떨거나, 왼 발을 높이 차거나 하는 장난에 몰두한다.) 그렇게 ‘나’, ‘다’, ‘라’… 등이 결정되고, 소리내기와 몸짓내기가 결정된다. 내가 볼 때 이때 작동되는 논리는 미리 분리되고 구별된 동작들 혹은 자세들 중에 몇 개를 선택하고 조합하는 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몸-마음의 느낌에 따라 소리를 내고, 그 소리에 따라 몸짓을 해보며, 적절한 것을 추려내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이를 소위 <감각교육>이라고 불렀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감각> 개념은 지나치게 일상적 ‘감각’의 그것으로 좁혀져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감각은 그저 감각의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생각된 것이다. 그러니 감각교육이 아무리 야생적이거나 색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사고 수준에서 감각은 하나의 감각으로 남는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감각하는 행위 속에는 감각가능하지 않은 어떤 것이 감각되는 경우들이 있다. 시각적인 것에도 시각적이지 않은 것이 있다. 이 비감각적 감각, 벤야민이 ‘비감각적 유사성’이라 불렀을 이 감각이야 말로 <감각의 페다고지(pedagogy)>에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하고 시작하는 송창식의 노래를 듣는다고 하자. 이때 우리는 분명히 귀에 도달한 음파를 통해 어떤 것을 듣는다. 특유의 음색, 음의 높이, 분절되는 가사음절, 반주 소리, 박자 등. 하지만 그 소리 아래로 흐르는 어떤 리듬, 색조의 변화, 정조의 변화는 그 자체로 감각되는 게 아니다. 단지 또렷한 감각 언저리에서 어렴풋이 우리는 그 느낌을 가질 뿐이다. 이게 바로 ‘감각되지 않는 감각’의 영역이고, 앞서 말한 생기 감응의 영역이다. 더구나 이 기이한 감각이 있기에 우리는 소리에서 그와 유사하지 않지만 “비감각적으로 유사한” 몸짓으로 이행하고, 몸짓에서 몸짓을 연속적으로 이어가는 안무적 리듬으로 이행한다. 이것이 리만 다양체중의 하나인 민코프스키 공간 혹은 유클리드 공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시간을 품은 세계선(world line)이다. 알베르 미쇼트는 이 물리학적 개념을 갱신해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의 이행에서 벌어지는 변화와 그 변화의 지각현상 모두에 적용해 사용한다. 미쇼트는 세계선(世界線)을 “계속해서 상이한 양상을 띠는 단일한 과정”(혹은 “생성becoming”)이라 불렀다.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지각 대상들을 끊고, 자르고, 고정화 시키고, 언어로 분절시켜 흐름인 세계를 ‘이미 확립된 대상’의 환경세계로 만드는 데 익숙하지만 실상, 세계는 자신의 선을 그리며 나아간다. 문화예술은 이 선을 그 자체로 붙잡고자 하는 노력이 아닐까? 그리하여 특이한 경험을 선사하고, 공유하며 비판과 사유가 가능한 들판으로 이끄는 것은 아닐까?

 

 

3

 “자 이제 우리 몸 안에서 나는 소리를 표현해볼까요?”
 간식시간이 끝나고 다시 수업이 시작된다. 아이들은 저마다 몸 안에 어떤 소리가 있는지 골똘히 생각한다. 꼬르록 소리, 심장 소리, 침 넘어가는 소리 등 여러 소리들이 표현되기 시작하고, 자연스레 몸동작으로 이어진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도 자세히 보면 훌륭한 표현의 오브제가 되는 것이다. 이게 일상의 도구논리를 깨는 도취의 논리이다. 예술은 저 멀리 도달하기 힘든 곳에 있는 게 아니다. 좋은 인생이 우리의 나날의 사이사이에 있듯이 좋은 예술적 계기들도 일상의 사이사이에 숨겨져 있다.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게 도취이고, 사이사이에서 벌어지는 게 관계의 논리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관계는 선이다”고 한다. 그럼, 역으로 우리는 아이들이 그려가는 세계-선은 하나의 관계이고, 생성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대상의 감춰진 면, 타인의 주목받지 못했던 면, 알려지지 않았던 자기 자신의 몸을 다시금 살펴보고, 느껴보면서 나와 나의 관계, 나와 타인, 주변, 세계와의 관계가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다. 이게 윤리적 관계이며 패러다임이다. 어떤 지식의 참과 거짓, 그것에 대한 테스트, 오류의 적발, 수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4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일상의 도구화된 몸과 도취의 몸을 온전히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동시에 그것을 유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그 과정에 대한 자기 통제와 비판적 성찰을 전제하고 있다. 호크마 선생님들은 어쩐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내공(!)을 잘 갖췄다는 느낌이 온다. 교육 참여자들 또한 느낌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러한 자기 통제와 비판적 성찰에 이른다면 더욱 성숙한 교육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정이 끝나더라도 스스로 습득한 비판적 태도와 시각은 지속되며, 이를 계속 유지하면서 삶의 ‘수련’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련은 살아감의 기술터득이자 지혜의 습득이며, 인생의 자기 구축의 미학이다. 따라서 수련 혹은 배움의 과정은 단순한 지식 ‘전달’, ‘전수’와는 다르다. 지식은 진리절차가 끝난 어째보면 김빠진 정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배움과 수련은 부차적인 것으로만 다뤄져왔다. 푸코 또한 진리 패러다임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배움과 수련을 자기 수양의 패러다임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지식-진리의 패러다임에서 윤리적, 미학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이미 알려진 지식들 중에서 무엇을 얼마나 잘 알고, 잘 전달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미지의 영역을 어떻게 발견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배움은 그저 지식-진리에 도달하는 단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식-진리 패러다임을 벗어나 윤리 패러다임에서 보면 배움은 그 자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부단한 물음과 답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 과정은 지식전달의 완료가 아니라 마치 인생처럼, 새로운 세계선의 구성, 새로운 생성의 열린 과정이 될 것이다.

 

  호크마의 ‘바디 토크’는 신체와 소리, 한글이라는 언어요소 들이 어우러져 각각의 스토리와 모두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일종의 여행이다. 따라서 매번 매번이 하나의 완성이 되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일회적인 한 번의 공연을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하고서 짠하고 터트리는 클라이막스 유형이 아니라, 매번 나름의 완성도를 만들어 힘 있는 고원들을 이뤄가는 과정형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상호 포함적이고 상호 성숙의 시간이다. 호크마 대표가 말하는 것처럼 “아이들의 순수한 몸짓”은 오히려 강사들에게 배움의 계기가 되고, 또 아이들은 자신의 숨겨진 몸의 능력들을 발견하는 놀라움과 즐거움의 계기가 된다. 오라 호크마 여행으로!  

 

 




지지봄봄
21호 가봄 | 현장스케치
제작·놀이·실험의 아지트, 릴리쿰에 가다
송수연 / 언메이크 랩


(출처 : 릴리쿰, reliquum.co.kr )

 


 DIY 문화, 개인 제조에서 교육, 사회문제 해결에 이르기까지 제작과 기술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도시재생 프로젝트, 메이커 스페이스 등을 매개로 제작 이슈가 확장되고 있고, 직접 생산적인 일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기류는 정책과 공적 기금 지원, 문화예술 현장에도 영향을 미치며 또 다른 순환을 만들어 낸다. 제작문화에 대한 수사가 많아지는 부흥의 시기다. 하지만 이 부흥적 기류가 실제 쌓아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을지 예측은 어렵다.

 

 제작 또는 만들기에는 다양한 문화적·사회적 함의가 있다. 그 중 교육과 관련해 중요한 지점은 만들기를 통한 수행적 배움이다. 그것은 "나만의 ㅇㅇ"을 만들고 사용하는 것을 넘어, 보다 자기 삶에 대한 분별과 연구가 이루어 질 수 있게 하는 배움이나 태도에 이르는 것에 가깝다. 지속적인 수행의 과정 속에서 만들면서 질문하고 실패하고 다시 생각을 확장해가는 것이 만들기, 제작의 힘이다. 이런 과정은 사물을, 또는 도구를 세련되게 잘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원리나 구조를 이해하며, 모르는 것을 인지하고 다른 맥락으로 감각과 지식을 확장 또는 연결, 질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교과서나 정리된 매뉴얼에는 없는 개인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배움이기도 하다. 이런 배움의 과정은 지식의 바로미터가 되기보다는 삶에 대한 태도로 내재화된다. 그래서 문화예술교육에서 제작 또는 만들기는 새롭게 환기해서 해석해 볼 수 있는 이슈이기도 하다.

 

(출처 : 릴리쿰, reliquum.co.kr )

 

 하지만 이런 수행적 배움이라는 과정이 지금의 현실에서 유효한 것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획일화된 주거 공간에 맞추어진 인스턴트형 조립식 가구의 애용자, 블랙박스처럼 밀봉된 전자 사물들을 쉽게 뜯어 볼 수 없는 수동적 소비자, 표준화된 마트형 삶에 익숙해지고 있는 삶의 모습.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쉽게 의견을 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우면서 유머 있게, 민첩하게 지속하며, 질문해야 하는 것이 문화와 예술의 힘이기도 하다.

 

 이번 현장 탐방에서는 만들기를 이슈로 실험과 모험을 하고 있는 릴리쿰을 찾았다. 연남동 작은 차고를 개조해서 만든 공간 릴리쿰은 제작·놀이·실험의 아지트이다. ‘놀면서 만들고 만들면서 논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땡땡이공작으로 시작한 그들의 활동은 일과 놀이, 삶이 분리되지 않는 다양한 발신을 시도한다. 이들의 진화하고 있는 수행 모험담을 릴리쿰의 호랑, 물고기와의 이야기를 통해 정리해 보았다.

 
릴리쿰을 만들게 된 배경과 멤버들이 함께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 소개를 부탁한다.

 릴리쿰이란 공간을 만들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 자연스러울 거 같다. 릴리쿰이라는 공간은 땡땡이공작이라는 활동을 하면서 공간의 필요를 느끼게 되어 자연스럽게 만들게 되었다. 땡땡이공작은 2012년 초 활동을 시작했다. 참여 멤버 각자 본업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 활동을 함께 추구해 보자라는 취지였다. 1년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니 활동을 좀 더 제대로 하고 싶고, 욕심을 가지고 제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작은 공간과 도구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 다들 일을 하고 있어서 쉽지 않았다. 그때 오랜 친구였던 도요가 헬싱키에서 5년을 유학하고 귀국을 한 상황이었다. 그 친구도 작업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함께 해보자 라는 얘기를 나누어서 이태원에 공간을 가지게 되었다. 임대료가 낮은 공간을 원했는데 우연히 큰 공간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 공간을 어떻게 쓸까 고민을 했는데, 그 이전에 서교동에 있던 ‘노닥노닥’이라는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 공유공간에 대한 경험이 있었고, 그 경험을 각자의 일, 그리고 공간과 연결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기존에 해왔던 ‘만들기, 놀이, 삶의 방식’ 이런 것들을 좀 더 연결하며 폭넓게 정의를 하며 공간을 시작했다. 첫 번째 공간인 이태원의 릴리쿰 공간은 2013년 9월에 시작했고, 이곳 연남동으로는 2015년에 왔다. 

 

 공간을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공간일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공간에 대한 목표가 현실화되었을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준비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여러 시도를 할 수 있어서 좋다. 현재 릴리쿰이 주력하는 활동은 놀이-기술-예술분과로 나누어져 있다. 지금은 공공 놀이터를 열거나 놀이 공간 혹은 도구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고, 기술은 ‘전자놀이연구소’를 하고 있다. 연속성 있는 프로젝트는 그 두 가지인 거 같다. 

 

 


땡땡이공작부터 릴리쿰에 이르기까지 활동의 면모를 들여다보면, 스스로 그리고 함께 배움을 확장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이런 활동이 본인들의 삶에 어떤 질문과 의미를 갖고 있는가? 

 올 초에 전시 준비를 하며 우리의 활동을 정리해보니 ‘놀이, 자율, 생산’ 세 가지로 정리되었다. 세 가지 키워드는 우리가 이 활동을 하며 느끼는 의미를 정리를 해본 거였다. 물고기는 회사 조직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나왔고, 호랑은 조직 생활을 좀 무서워하며 피했던 거 같다. 누군가가 그린 그림, 판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하고 싶은 활동을 찾고 발신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의미인 거 같다. 스스로의 삶에서도 그 세 가지의 전환이 있었던 거 같다. 

많은 사람들이 릴리쿰의 『월간 실패』를 인상적으로 보는 것 같다. 릴리쿰에게 실패의 의미는 무엇인가?  

 『월간 실패』는 아이디어는 나누었지만 계속 마음만 먹고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작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패 경험들을 매뉴얼로 만들어 공유하는 프로젝트다. 제작에서 실패의 경험은 성공 매뉴얼보다 더 많이 생산되고 중요한 자원이다. 2015년 <공간의 생산>이라는 토크에 초대되면서 시작되었고, 모임에서는 제작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패 사례들을 주제어와 에피소드로 모아놓고, 사람들이 주제어를 보고 신청하면 우리가 일종의 오디오북이 되어 그 사례에 대해 이야기를 전달해 주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서 계속 추가해서 만들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실패하더라도 『월간 실패』에 소개할 사례로 받아들이면서 실패에 대한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런 실패들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우리 활동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후 『월간 실패』는 오브제와 텍스트가 결합된 아트북 형태로 만들어져 계속 제작되었다. 릴리쿰이 실패를 기꺼이 선택하는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릴리쿰, reliquum.co.kr )

 


지난해 『손의 모험』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책의 출간 과정은 어땠나? 

 『손의 모험』은 코난북스에서 먼저 제안이 왔었다. 온라인을 통해 우리 활동을 알게 된 이정규 편집장이 손으로 만드는 작업들과 어우러지는 릴리쿰 공간에 호감을 느꼈고 그런 것들이 책으로 전달되면 좋겠다고 얘기하셨다. 처음에는 가벼운 에세이처럼 구성되길 원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접근을 했는데 쓰다 보니 내용이 더 무거워졌다. 그러다 보니 3년간의 활동 경험을 갈무리하는 것과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같이 섞이면서 출간에 2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책이라는 매체가 주는 무게감이나 현실과의 거리감이 우리의 생각을 가두는 것 같기도 했다. 출간 과정은 우리가 해온 실험들만큼이나 순탄치 않았다. 

 

전자요리라는 쉬운 전자공작을 위한 콘텐츠를 키트 형태로 계속 개발하고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키트 개발과 제작, 유통이 쉬울 것 같지 않은데 전자요리는 릴리쿰에서 어떤 화두를 가지고 있나? 

 전자요리는 누구나 쉽게 전자적 정보를 알고 요리 하듯이 전자적인 것을 다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키트를 매개로 한 콘텐츠 개발과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유통이 쉽지는 않다. 아직 개발을 하고 있는 단계이기도 하다. 우리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기반으로 생각으로 하고 있는데 아직 느슨하게 하고 있다. 

 

 다른 프로젝트와 비교해보자면, 놀이터 프로젝트의 경우는 전체적인 기획과 실행 그리고 전할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구성한 후 일관된 방향성을 가지고 놀이터를 만든다. 누군가가 놀이를 하게 하는 건 너무 즐거운 일이니까 크게 어려운 점은 없지만, 문제는 놀이터를 행사로 만들면서 이걸 서비스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공통의 놀이 공간이 열렸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놀이동산에 왔을 때 서비스를 받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런 마음과 행동이 작동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최대한 줄이고 공간과 상황 설정만 만들었다. 참여 작가들이 진행을 하는 프로그램은 없애고, 사람들에게 우리의 메시지를 더 강하게 전달하려고 했다. 그렇게 운영을 하니 놀이가 일어나는 상황, 공간, 시간의 세팅이 재미있게 구성되었다. 놀이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에서 펼치는 걸로 바뀌니 사람들이 또 그걸 다른 방식으로 전유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전자요리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사람들이 기본 원리를 알고 나면 스스로 탐색하며 놀이로 전환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이 되길 바란다. 

 

 


최근 문화예술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측면에서도 ‘만들기’와 ‘제작’에 대한 관심이 많이 있는 거 같다. 기술적인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현장에서 이런 시도와 기획을 하시는 분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우리의 정체성은 교육자라기보다는 ‘출동’이라고 해야 하나. 시추선 같은 느낌이다. 먼저 연구를 해보고 그것을 알려주는 프론티어(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교육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을 하는 분들과는 차이가 있을 거 같다. 우리는 설계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준비 기간이 무척 긴데, 회의를 엄청 오래하고, 어떤 생각을 담을 것인가에 대해 많이 얘기하고, 프로토타입은 굉장히 설렁설렁하게 한다. 설계가 우리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는 과정 자체가 설계인 것 같다.

 

(출처 : 릴리쿰, reliquum.co.kr )

 


우리는 지금 기술권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기술권과 관련해 릴리쿰의 활동, 만들기란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로우 테크놀로지(low-technology)’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다. 

 로우테크는 좀 더 가지고 놀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기술인 거 같다. 하이테크 쪽을 사용자로서는 많이 쓰고 있지만 사실 생산자로서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이 로우테크인 것 같다. 여러 가지 분야의 로우테크를 땡땡이공작 초반에 건드려 봤던 거 같기도 하다. 로우테크는 뜯어 볼 수 있는 것, 뜯어 볼 수 있으면 분해도 조립도 수리도 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것을 다 뜯어봤다. 뜯어보고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까지가 로우테크인 것 같다.

 

 『손의 모험』을 출간을 할 즈음에 아쉬운 지점이 기술 이슈에 대한 것이었다. 더 고도의 기술이 내 일상을 지배하고 있고 주변에서 4차산업혁명에 대한 질문도 하시는데, 그런 지점이 책 출간 이후에 이슈화된 점도 있어서 책을 보는 독자는 자신에게 닥칠 기술적 삶과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정리를 해보진 못했지만 최근에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부분-젠더, 여성과 기술, 인공지능-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자극이 되면서 우리 활동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지점이 되었다. 지금은 우리가 하는 일, 나누고 싶은 것들은 로우테크로 방점을 찍고 있지만, 앞으로 달라질 수 있을 거 같다. 그래도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소비하는 방식보다는 이제껏 릴리쿰이 해왔던 것처럼 또 다른 탐험의 방식을 만들어갈 것 같다.

릴리쿰 http://reliquum.co.kr


지지봄봄
20호 가봄 | 현장스케치
내 안에 살아 있는 신화
2016년 여름 해오름어린이살림학교
최정필 / 오름어린이살림학교 교사
  1997년부터 해마다 계절학교를 준비해오면서 살림학교 선생님들이 모여 맨 처음 하는 일은 주제를 정하는 일입니다. 알려고 애쓰지 않아도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지식과 정보 속에 사는 요즘,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감각을 닫아버립니다. 감각을 깨우고 스스로 당당해지는 힘을 갖기 위해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내면에 품고 있던 힘으로 예술 활동을 하고 나면 닫아놓았던 감각이 열리고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올 여름학교는 신화를 통해 자신만이 가진 신성(神性)으로 미래에 싹 틔울 내면의 씨앗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아이들은 학년에 맞는 신화를 듣고 찰흙으로 신나는 조소활동을 하면서 신화를 내면화합니다. 


첫째 날

  서울에서 홍천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익히고 노래를 배웁니다. 이 자리에서 배운 노래는 수업을 시작하고 마무리할 때 부르면서 수업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주고 몰입했던 수업에서의 긴장감을 풀어주기도 합니다. 결이 고운 동요와 시는 아이들의 마음을 맑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노래 부르기를 거부하던 고학년들도 어느새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까지 신나게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은 행복해 보입니다.
  여름학교가 열리는 홍천의 해오름숲속학교에 도착한 아이들은 전체가 모여 차 안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고 몸을 움직이는 놀이를 합니다. 또 이 시간에 교사들은 간단한 시와 노래를 보여주면서 이번 주제에 대한 느낌을 전달합니다. 낮선 공간과 낮선 사람들 속에서 긴장하고 있는 아이들 마음이 편안하게 풀어지고 빨리 친숙해져야 깊이 몰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름에는 풀밭에 노끈으로 미리 만들어놓은 달팽이 모양에서 놀이를 시작했습니다. 달팽이 중심과 끝에 진을 치고 두 편으로 갈라섭니다. 양편에서 한 명씩 나와 달팽이를 따라 달리다가 마주치면 가위 바위 보로 승부를 가립니다. 이긴 사람은 앞으로 계속 달려가고 진 편에서는 다음 사람이 달려 나와 마주치면 같은 방법으로 승부를 가립니다. 상대편 진으로 들어가면 승리하는 놀이입니다. 두 번째 놀이는 네 박자의 리듬을 치면서 대나무를 건너는 쿵쿵짝입니다. 선생님 두 분이 대나무 두 개를 마주 잡고 앉아 리듬을 치기 시작하면 작년에 왔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시작을 합니다. 먼저 리듬을 익힌 고학년들이 따라서 뛰고 겁이 많은 1, 2학년은 대나무가 내는 소리에 맞춰 선생님과 선배들 손을 잡고 제자리에서 리듬을 내면화합니다. 리듬이 익숙해지면 대나무를 뛰어넘습니다. 움직이는 나무를 넘는 경험에 도전해서 성공한 아이들의 눈빛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자랑스럽습니다. 때로는 나무에 발이 걸리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점차 처음 가졌던 두려움이 사라지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면서 즐기게 됩니다. 


  전체 활동을 마친 아이들은 학년에 따라 세 모둠으로 나뉘어 모둠 활동을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콩주머니를 넘기면서 자기소개를 하고 평화를 위한 규칙을 정합니다. 그리고 색지와 도화지로 공책을 만들어 색연필로 시와 노래를 예쁘게 적어 넣습니다. 2박3일 동안 활동하고 나면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하기도 합니다. 흙과 친해지기 전에 시에 맞춰 마음과 힘을 모으는 동작도 익혔습니다. 높은 하늘과 넓은 땅 사이에 곧고 당당하게 서서 세상을 살아가는 나를 마음에 담아봅니다.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세상이 열립니다.

하늘과 땅이 
서로 마주 보며
세상이 시작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바로 서며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이제는 찰흙과 친해질 시간입니다. 커다란 덩어리의 옹기토는 느낌이 다른지, 학교에서 교구로 쓰는 작은 찰흙을 대할 때의 모습과 달리 아이들은 경건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찰흙 덩어리에서 두 손에 그득히 담길 만큼 떼어 반죽하기를 배웁니다. “영치기 영차, 노를 저어라~” 리듬에 맞춰 노를 젓듯이 찰흙을 누르면서 밀고 들어 올리면서 당기기를 반복하는 과정은 또 하나의 작은 리듬이 되어 호흡을 고르게 해줍니다. 체온을 품고 부드러워진 반죽 덩어리에서 찰흙을 떼어 공을 만듭니다. 두 손 안에 쏙 들어갈 만큼의 찰흙은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러가며 모양을 만듭니다. 빨리 잘 만들고 싶은 아이들은 손바닥에서 찰흙을 굴리기도 하지만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손바닥 전체로 공을 만듭니다. 눈을 뜨고 공을 본 아이들은 믿기 힘들만큼 동그란 공 모양에 안심하고 뿌듯해합니다. 만든 공은 옆에 친구에게 넘깁니다. 친구가 만든 공은 똑같은 찰흙으로 만들었는데도 내 공과 온도도 다르고 단단하기도 다릅니다. 아이들은 “이 찰흙은 굉장히 따뜻해요.”, “이 흙은 매우 차가워요.”, “와~ 이 반죽은 엄청 부드러워! 누구 거야?” 하며 저마다 자신이 반죽한 것과 다름에 신기해합니다. 옆으로 계속 넘기던 아이들은 자신의 공이 돌아오면 자신의 공이라는 것도 알아챕니다. 공을 한 손에 잡고 시를 낭송하며 동작을 반복해봅니다. 찰흙공을 잡은 두 손이 가슴에 머무르는 마무리 동작에서 다시 한 번 호흡을 고르고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이번에는 발로 찰흙 만나기를 합니다. 반죽해놓은 찰흙 덩어리를 한 손에 들고 수제비처럼 작게 떼어 바닥에 흩뿌립니다. 서로 부딪치지 않게 자리를 잡고 서서 발가락으로 찰흙을 집어옵니다. 움직이지 않는 발바닥 아래에 모은 찰흙은 발바닥과 발가락으로 반죽을 합니다. 발가락 사이에서 느껴지는 찰흙의 느낌이 이상하다고 했던 아이들도 정성껏 반죽을 합니다. 이번에는 친구들이 해놓은 반죽으로 옮겨가 느껴봅니다. 손으로 만들었던 공처럼 각자 다른 느낌에 아이들은 다시 한 번 신기해하고 이번에는 누구 것인지 맞춰보기도 합니다.

  고학년들은 길가메시 신화를 듣고 길가메시의 모험을 찰흙으로 표현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 인상적인 장면, 좋아하는 인물을 자유롭게 표현했습니다. 길가메시, 엔키두, 훔바바, 하늘의 황소 등을 만드는 아이도 있었고 죽음의 강을 건너는 길가메시, 영생의 풀을 먹는 뱀, 길가메시와 엔키두의 싸움 등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의 놀라운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작품은 내면에 숨어 있던 창조성을 드러내는 예술작품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발표하는 아이들은 신화의 의미를 다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길가메시의 모험과 도전을 마음속에 굳게 새긴 아이들은 다가올 미래를 도전해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리라 믿습니다. 

  가운데 학년은 세상이 생겨난 이야기를 듣고 천지창조와 세상의 조화를 표현했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할 무렵의 아이들은 ‘나는 어디에서 왔지?’,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처럼 근원적인 물음을 갖기 시작합니다. 혼돈과 고요함에서 신이 되어 세상을 만들어본 아이들은 마무리 발표 시간에 9명 모두 신이 되었습니다. 
  땅의 신, 바다의 신, 불의 신, 지혜의 신, 동물의 신, 예술의 신, 사람의 신, 음악의 신, 퀴즈, 배려의 신입니다. 이들 신들은 서로 협력하여 이 세상을 창조합니다. 땅의 신과 바다의 신이 춤을 추며 땅과 바다를 만들고, 불의 신이 온 세상을 따뜻하게 밝혀줍니다. 이윽고 지혜의 신이 지혜를 세상에 퍼뜨리고, 동물의 신이 찰흙 대신 종이로 접은 종이학을 보며 주문을 외면 갑자기 까마귀, 거북, 늑대, 호랑이 등의 동물들이 각자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사람의 신은 찰흙으로 만든 사람에게 피리로 생명을 불어 넣어 움직이게 합니다. 예술의 신도 신비한 주문을 읊조리고, 음악의 신은 옆에서 다른 신들이 신비하게 보이도록 신비로운 선율을 연주합니다. 마지막으로 배려의 신은 이 연극을 보고 있던 다른 신들에게 퀴즈를 냅니다. 아홉 신들은 어떤 신들일지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누가 봐도 어떤 신인지 알 정도로 잘 표현해서인지 다 맞춥니다. 

  이해하기보다는 느끼는 감각이 발달하는 시기의 저학년 아이들에겐 세상은 따뜻하고 그 안에서 ‘나’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중요합니다. 마고할미 신화와 삼신할머니 이야기는 세상의 시작과 소중한 나의 탄생에 대해 안정감을 갖게 해줍니다. 발로 만났던 찰흙에 이어서 한라산과 백록담을 만드는 마고할미가 되어보고, 삼신할머니가 귀중한 나에게 준 보물은 무엇인지 생각한 아이들은 찰흙으로 만든 두꺼비집 속에 자신만의 보물을 간직했습니다. 양보하는 마음, 용기 있는 마음, 잠자리를 잘 잡고 싶은 마음,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아이들의 보물입니다. 



둘째 날

  이른 아침, 마을 이장님 댁까지 2km를 걸어가서 감자를 캤습니다. 호미로 흙을 뒤집고 감자를 꺼내는 선생님의 시범을 본 아이들은 서로 호미를 잡고 싶다고 난리입니다. 유난히 뜨거웠던 올 여름의 더위가 무색할 만큼 저마다 열심입니다. 처음 호미를 잡았던 아이들 중 몇은 감자가 상하지 않게 흙을 뒤집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고 슬그머니 호미를 내려놓기도 합니다. 조심스럽게 감자를 캐고, 주워 담던 아이들이 아침밥을 먹기 위해 숙소로 돌아간 자리에는 힘에 부쳐 찾지 못한 감자가 자꾸 나옵니다. 아이들이 캔 감자는 포슬포슬하게 쪄서 물놀이 할 때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간식으로 먹었습니다. 갈아서 전으로 부쳐 먹고 반찬도 해먹었습니다. 그렇게 먹고도 아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캔 감자의 맛에 감동해서 자꾸 감자를 달랍니다.

  점심을 먹고 찰흙으로 커다란 공동 작품을 만드느라 온몸에 찰흙 범벅이 된 아이들과 계곡으로 가서 물놀이를 합니다. 먼저 도착해서 놀기 좋게 둑을 쌓은 고학년들은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둑을 쌓았는지 알아!” 하면서 자신들의 공을 알아달라고 합니다. 교사들과 동생들의 칭찬에 우쭐해진 아이들은 바깥 온도에 비해 너무 차가워서 물에 선뜻 들어가지 못하는 동생들도 잘 데리고 놉니다. 물장구를 치고 다슬기와 물고기를 잡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체격이 작은 아이들의 입술이 파르스름하게 변하려고 할 즈음 뜨끈한 감자와 옥수수 간식이 도착했습니다. 감자가 채 식기도 전에 시원한 매실차와 수박을 곁들여 금세 다 먹어치우고는 다시 물놀이를 시작합니다. 신나게 놀던 아이들이 “선생님 신발 한 짝이 물에 떠내려가요!” 하고 소리칩니다. 신발을 잡기 위해 교사도 뛰고 아이들도 뛰는데 정작 신발이 벗겨진 아이는 꿈쩍도 안하고 가만히 서 있습니다. 결국 6학년 아이가 빠른 계곡물보다 빨리 달려 신발을 낚아채 동생에게 신발을 신겨주고 박수를 받았습니다. 

  물놀이를 다녀온 아이들은 젖은 옷 때문에 방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더니 가위 바위 보로 순서를 정해 들어가 씻고 순서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놀이를 하며 순서를 기다립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평화를 지키기 위해 참고 배려하는 아이들이 참 대견합니다. 어른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감자 캐고 무더위에 커다란 찰흙과 씨름 하고 물놀이까지 다녀오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아이들은 저녁밥 먹고 나서까지도 쌩쌩합니다. 저녁 모둠활동을 마친 아이들은 손가락에 봉숭아를 물들이고 잠자리에 누워 오늘도 이야기를 세 편이나 듣고서야 잠이 들었습니다.


셋째 날

  여름학교에 와서 벌써 두 번이나 잤습니다. 아침 산책을 다녀와서 밥을 먹고 아이들은 모둠별 발표를 준비합니다. 그동안 불렀던 시와 노래 중에서 가장 익숙한 것을 고르고 동작까지 맞춰봅니다. 그리고 이틀간의 이야기와 활동에서 느낀 내용으로 퍼포먼스를 만들고 서로 독려하며 연습을 합니다. 

  첫날 전체가 모여 노래하고 놀이했던 강당으로 모였습니다. 앞에 나서서 발표를 해야 한다는 긴장감으로 들떠 있는 아이들이 교사들의 시와 노래를 들으며 차분해집니다. 저학년 모둠은 노래에 맞춰 리듬이 있는 동작을 합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가운데 학년들은 쑥스러움을 살짝 감추고 색깔 보자기를 활용해 개성을 드러냅니다. 고학년들은 가운데 학년 아이들이 썼던 보자기와 가지고 있는 물건까지 최대한 활용합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연습하고도 마치 할 수 없이 하는 것처럼 쑥스러움을 감춥니다. 

  발표도 잘하고, 아픈 사람 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지냈으니 내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격려 박수를 쳐주고 노래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모둠방에 올라가 2박3일을 되돌아보면서 모둠 선생님과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정리했습니다.

  아직 어른의 호흡이나 맥박의 리듬을 갖지 못한 아이들에게 리듬은 중요합니다. 안정적인 리듬은 일상생활과 학습의 장면 모두에서 아이들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내면의 힘을 키워 밖으로 영향을 주게 합니다. 그래서 살림학교의 2박3일의 일정 동안 주제를 풀어내는 수업시간 이외에도 자고 먹는 것까지 모든 활동에서 리듬을 갖습니다. 아이들은 어떤 리듬을 갖는지 알지 못하지만 아침 7시부터 밤10시까지 이어지는 일정에도 지치지 않고 신나게 움직입니다. 

  직업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우리나라 교육에서 공부는 힘들고 어려운 것이어야 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초등학생 아이들이 공부를 하며 재미있어 한다면 놀기만 하고 배우는 것은 없다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육이 예술적으로 이뤄진다면 아이들은 열정적으로 즐겁게 배웁니다. 이것은 독일에서 시작된 발도르프교육을 만든 루돌프 슈타이너의 이론입니다. 즐거운 공부를 경험한 아이들의 열정을 품은 눈빛은 교사도 성장하게 합니다. 


지지봄봄
19호 가봄 | 현장스케치
청년, 지리산에 모여 청년을 이야기하다
지리산 이음포럼 2016
임정아 / 발도르프학교 교사


  〈지리산 이음포럼〉은 1년에 한 번, 청년들이 지리산에 모여 몸과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경험과 계획 등을 교류하는 포럼이다. 올해는 “청년, 지리산에 모여 청년을 이야기하다”라는 주제로 10월 1일부터 3일까지 지리산 남원시 산내면 일대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우리동네사람들에서 공동 주거를 시작한 지 5년이 되었고, 친구들과 함께 커뮤니티펍을 운영한지 2년이 되어간다. 지리산으로 출발하기 전에 ‘함께 살고 일하는 것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가? 돈을 벌기 위해서? 공간이 필요해서? 나는 내 안의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나’라는 질문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지리산 이음포럼〉에 다녀왔다. 

  지리산 산내면은 많은 귀농인들이 찾는 곳이다. 실상사(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의 지리산 기슭 평지에 있는 사찰)가 있어 오랜 시간 동안 마을 공동체의 맥을 이어가고 있고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토닥협동조합’이 생긴 이후 더욱 활력이 돋는 듯하다. 마을에서 자란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들이 운영하는 가게도 있다.

  이번 포럼에는 전국에서 활동하는 100여 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포럼의 주제는 ‘청년’인데 포럼을 진행하는 방식이 참신하다. 주최 측에서 테이블 진행자를 섭외하는 방식이 아닌 청년들이 직접 주제를 정해서 테이블 진행자를 신청한다. 일반 참가자들은 주제를 보고 관심 있는 테이블에 신청하는 형태이다. 청년들이 마련된 장에서 스스로 주제를 정하고 선택하는 방식이 참여자들의 관심을 높인다. 청년들의 고민이 비슷한가 보다. 테이블 주제가 나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첫날 조금 일찍 도착했다. 예전에 인연이 있던 ‘감꽃홍시’ 게스트하우스에 들렸다. 예전에 만났던 주인은 없고 그녀의 어머니가 계신다. 처음 보는 우리에게 뒤뜰에 가서 잘 익은 감을 따 먹으라 하신다. 끝에 고리가 달린 긴 장대를 가지고 처음 감을 따 본다. 잘 익은 감, 덜 익은 감이 함께 따졌다. 우리에게 감을 따라 하신 어머니와 자연에게 선물 받은 느낌이다. 무언가를 주고받을 때 따지게 되는 마음은 언제부터,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본래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주고받고 다시 또 주고받고 하는 것이 아닐까.



  늦은 오후 시작된 포럼은 자기소개를 간단히 적은 종이를 들고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됐다. 더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내 얼굴의 한 부위씩을 그려주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 얼굴 그림이 완성되어갔다. 청년이 주제이지만 청년을 자녀로 둔 50대 여성, 곧 군대에 갈 20살 청년,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는 18세 친구 등 참여자들의 연령대가 다양하다. 고민도 관심사도 다양하다. 내 고민, 내 생각에만 빠져 있다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삶이 환기되는 느낌이다.



  첫 날의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동네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식사 이후에는 자유 시간으로 청년들이 운영하는 ‘마지’라는 가게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저녁 시간에는 음악회에 가는 사람, 동네 카페 ‘토닥’에서 차를 마시거나 만화책을 보는 사람, 서울에는 흔하지만 산내에는 딱 하나 있는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 등 각자의 흐름에 맞게 저녁 시간을 보낸다. 

  나는 일찍 숙소로 돌아와 함께 방을 쓰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침 일찍 노고단에 다녀왔다는 50대 여성분은 “청년이 꼭 나이겠느냐. 스스로 하고 싶은 게 있고 찾아 움직이면 청년이지” 하시며 방긋 웃으신다. 그녀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 날에는 오전, 오후로 나눠 다양한 주제 테이블이 열렸다. 테이블 주제는 “세대를 뛰어 넘어 함께 일하는 워크숍”, “청년, 자원봉사와 열정페이를 말한다”, “청년들의 의식주 현실 속에서 의식하는 주체로 자리 잡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마을 공동체 실험” 등 10가지가 넘는 다양한 주제가 준비되어 있었다. 주제별 장소도 학교 강당, 실상사, 카페 등 다양한 곳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명상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모인 사람들이 일주일간 어떤 마음으로 보내었는지를 나누고 명상을 한 후 소감을 이야기하는 자리로 각자의 마음을 나눔으로써 참여자들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였다. 오후 시간에도 흩어져 테이블이 진행되었다.



  저녁 시간에는 실상사에서 음악회가 열렸다. 포럼에 참여한 청년, 동네 주민들 모두 함께했다. 내 앞에 앉은 꼬마 아이가 집에서 가져 온 계란을 하나 나눠준다. 먹을 것을 나누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함께 음악 듣고 노래를 부르며 둘째 날 밤을 보낸다.



  포럼은 청년들이 모일 장을 마련해 주었다. 숙박은 동네 민박 10여 군데로 나눠서 하고, 식사는 동네 식당 3곳으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초등학교 강당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아침은 동네 빵집에서 만든 빵으로 동네 카페에서 먹었으며, 실상사에서는 음악회가 열렸다. 포럼의 장을 마련한 협동조합 ‘이음’과 마을 공동체 모두가 함께하지 않았다면 진행되기 어려웠을 일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인 100여명의 청년들이 산내마을 전체를 무대로 2박 3일 잘 놀다 가는 시간이었다. 예술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처음의 내 고민으로 돌아갔다. ‘나는 어떤 목적,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을까?’ 내 고민이 오롯이 나에게만 있거나 나를 위해서만 하는 고민은 아닐 테다. 마을 공동체가 살아 숨 쉬는 한공간에 몸을 담으니 각자 살고 있지만 함께 살고 있음을, 또 함께 살아가지만 스스로 살고 있음을 되새길 수 있었다. 다시금 나의 삶, 우리의 삶을 따로, 또 같이 꽃피우며 살아보고픈 생각이 간절하게 일었다.


지지봄봄
19호 가봄 | 현장스케치
에즈원커뮤니티를 다녀와서
조정훈 / 우리동네사람들


  〈에즈원커뮤니티〉(이하 에즈원)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비행기로 1시간 반을 날아 도착한 일본 나고야 쥬부공항에서 쾌속선과 자동차를 타면 약 1시간 만에 도착한다. 새삼, 일찌감치 아시아는 일일생활권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에즈원을 방문지로 선택한 것은 이 공동체가 진행하는 실험이 근본적으로 현대 사회의 문제를 푸는 데 상당히 효과적인 대안일 뿐더러 부작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돌아보면 우리는 좋은 사회를 위해 신념을 가지고, 그 신념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삶에 익숙해져 왔다. 공동체 역시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희생과 양보는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왔고, 개개인의 욕구가 다 분출되면 사회의 혼란이 가중될 것임에 의심의 여지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아니, 공동체란 무엇이고 대의란 무엇이며, 사회는, 또 욕구라는 것은 무엇인가. 

  에즈원에서는 질문이 일상적이다. 독특한 것은 질문하는 방식이다.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무엇인지 살핀다. 답을 정해놓고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도 아니다. 예를 들어 ‘행복하고 싶다’고 하면 ‘행복’에 대해 살핀다. “나는 행복이란 것을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해요.”라는 입장을 듣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결론 내린 정답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행복하고 싶다’는 개인의 그 마음 저변을 스스로 하나하나 살펴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간다. 처음엔 이런 방식이 낯설다보니 정답이 있을 것이란 추측 속에 그 정답을 빨리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습관마저도 결국엔 나를 살피게 되는 것임 후에 깨달았다. 이런 살핌을 ‘사이엔즈’란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고, 이것이 여타 공동체에서 찾아보기 힘든 에즈원의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이다. 


연구소와 스쿨, 마을공동체

  에즈원은 크게 세 개의 틀로 구성된다. 과학적 본질의 탐구 방법이자 실현 방법이란 의미의 사이엔즈연구소, 사이엔즈 방식을 사람들에게 익히게 하는 사이엔즈스쿨, 그리고 일상적인 개념의 마을공동체가 그것이다. 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연구소와 스쿨이 마을공동체를 지탱하는 축이 되고, 마을공동체는 연구소와 스쿨의 연구 성과와 경험을 녹여내는 삶터이다. 

  에즈원의 목적은 다툼이 없는 사회, 개개인이 행복한 사회를 전 지구적으로 실현해나가는 것이고, 16년 전에 소수의 인원이 모여 여기 일본 미에현 스즈카시에서 〈에즈원커뮤니티〉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이제는 150여 명이 함께 살아가는 도심 속 마을공동체가 되었고 적극적으로 외부에 에즈원의 경험을 알려가고 있다.  


어머니 도시락 가게


  탐방 일정은 빡빡했다. 아침부터 마을공동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시설들을 돌아보며 운영자들과 미팅을 이어갔다. ‘어머니 도시락 가게’는 에즈원을 경제적으로 지탱하는 가장 큰 영역인데 30~40여 명이 함께 일을 하며 사이좋은 관계를 만드는 실험장이기도 하다. 도시락 가게의 사장 역할을 하고 있는 류상은 영업이 안정된 건 근래의 일이며 그간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말하였다. 의무감으로 일을 하는 사람, 기분이 나쁘면 마구 화를 내는 사람, 가게가 어려워지니 사람보다는 돈 버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사람을 수단화하는 사람 등 도시락 가게의 애초 설립 목적과 맞지 않은 일들이 벌어져 여러 번의 재검토를 거쳐 왔다고 한다. 이제는 다들 남을 탓하기보다 자신의 상태를 내어놓고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아닌 편안한 상태에서 일을 조정하는 분위기가 되어 즐거운 일터가 되었다고 한다. 에즈원으로 유학을 와 도시락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도시락 주문이 많아 일은 좀 고되지만 상하관계로 서로 눈치를 보거나 인상 찌푸리며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도시락 가게는 정기적으로 연구회를 열어 일하는 사람들이 도시락 가게를 운영하는 각자의 목적을 나누고, 목적에 맞게 해나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시간도 갖는다고 한다. 미팅 내내 분위기가 편안했다. 





마을농장 스즈카팜

  에즈원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기관은 스즈카팜이란 이름의 밭공원(마을농장)이다. 근처 대형 마트의 땅을 무상으로 빌려 2010년부터 농사를 짓고 있는데, 공동체가 먹고 도시락 가게의 재료로 쓰이는 기본적인 채소들은 여기서 생산한다고 한다. 미팅은 30대 중반의 젊은 기수 코이치씨와 이루어졌는데 도쿄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자기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고 했다. 농장의 운영 현황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짧게 이루어졌고, 상하가 없는 자유로운 팜의 기풍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이런 기풍이 익숙지 않은 우리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누군가는 피해를 입지 않는지, 서로가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는지” 등과 같은 우려의 질문을 쏟아냈다. 이에 코이치씨가 답하는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의 의미가 남달랐다. 우리는 주로 억압된 상태에서 지내다보니 ‘하고 싶은 것’의 의미를 ‘일을 다 팽개치고 놀고 싶다는 것’으로 상상하게 되고, 그러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 지었지만 코이치씨의 설명을 들으며 에즈원에서 이야기하는 ‘마음껏 한다(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의 의미는 내외부의 억압이 사라진 상태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드러내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서로 지지해준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일과 놀이가 다르지 않고, 각자 하고 싶은 일을 꺼내놓고 조율을 하니 참는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개인도 스스로를 억압하지 않았고, 공동체의 구조 역시 그렇게 되어 있는데, 구조에 사람을 맞추기보다는 함께 생활하는 사람을 위한 구조가 성립한다는 공감대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농장에서도 정기적으로 목적과 수단을 점검하는 연구회를 연다고 한다. 


 농장의 코이치씨



마을회관과 오피스

  에즈원의 마을회관 역할을 하는 스즈카컬쳐스테이션은 지역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행사도 열고 찻집도 운영하는 등 모임 공간으로 활용되는데, 그 안에는 에즈원 커뮤니티 사람들을 위한 행정 및 상담 업무를 하는 오피스와 공동으로 물품을 구입해서 나누는 가게 조이(JOY)도 있다. 오피스는 택배나 열쇠 등을 맡기거나 집집마다 내는 공과금을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등의 기능과 함께 사람들의 고민이나 의견을 듣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50, 60대가 주축인 에즈원의 특성상 오피스를 통해 노인들이 하기 어려운 일들을 쉽게 처리하니 꽤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피스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에즈원 사람들 중 50여 명이 뜻을 모아 하나의 지갑을 쓰는 것이었다. 마치 가장이 벌어오는 돈을 가족들이 함께 쓰는 것처럼, 가족 같은 사이가 된 사람들이 같이 돈을 모아 관리하고 필요한 만큼 쓰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탐방단의 질문은 자연스레 “그렇다면 누군가가 돈을 마구 써버리면 어떻게 하는가”라는 우려로 이어졌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 역시 우리의 억압과 단절감을 드러내는 질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오피스의 대답은 공용 돈의 지출이 많아 질 경우 마을 사람들에게 공지를 해서 쓰임을 줄이거나 더 보충하는 방법을 구상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며, 우려하는 것보다 돈을 쉽게  쓰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 ‘한 지갑’에 최근 합류한 이치카와씨는 “자신도 처음에는 내 돈이 다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 내 마음대로 못 쓰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막상 시작 해보니 오히려 더 편리하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돈이 늘 부족하단 생각에서 오는 억눌림이 있거나 관계에서의 억눌림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니, 소비로 욕구를 풀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학교 사이엔즈스쿨

  에즈원 사람들의 이런 분위기는 사이엔즈스쿨을 통해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원할 경우 매달 열리는 사이엔즈스쿨에 참석한다. 스쿨은 보통 4박 5일로 열리며 참가자들은 그 시간 동안 자신을 깊게 탐구한다. 마이라이프 세미나부터 인생을 알기 위한 코스, 사람을 듣기 위한 코스, 사회를 알기 위한 코스 등 열리는 코스의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참가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스쿨을 통해 자기자신의 흐릿하던 것들이 분명해지고, 문제의 본질을 탐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에즈원의 색깔을 내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자신을 탐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지지하는 사람들과 직장, 마을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이 참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짧은 탐방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한번 살펴볼 새도 없이 일만 하며 살다, 나이가 들고 어느덧 병에 걸리거나 허무감에 외로워지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의 사회 현실을 돌아보며 에즈원의 실험은 여러 가지 질문과 대담을 떠올리게 했다. 무엇보다 목적과 수단을 제 위치로 돌리는 것이 에즈원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사람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와 기관들이 어느새 그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생의 목적이 되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본말전도의 현실을 돌아보면서 돌아가 나부터 차분히 지금껏 해온 일들의 이유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그 시간 이후 스스로에게 거듭 물어보곤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지지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