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 삶의 기술을 담은 문화예술교육 '장소'로서의 마을에 대해 생각한다

 

 

- 박형주 : 정리를 해보면, 공간과 장소는 다른것.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는.. 자는 공간인것이지 이곳이 내 추억과 향기가 쌓여 장소가 기억이 되고, 혹시나 내가 여길 떠난다 하더라도 기억이 활력이 되는 것이 있을텐데 그런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속 현장을 돌아다녀보면,  어떤 공간이던 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대부분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있는것이지, 그 안에서의 이야기는 형식적 이야기가 오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림을 그리고 연극을 한다는 활동을 하지만 생활적인 이야기는 시시껄렁한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끝나지 않나. 그런데, 그 이야기를 어떻게 자기가 앓고 있는 문제, 느꼈던 감명받았던 이야기들이 이 안에서 술자리처럼 쉽게 나올수 있게 유도를 할것이냐, 이곳을 어떻게 그런 장소로 탈바꿈해줄것이냐 라는 고민이 더 필요한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강원재 : 맞다. 교육이라고 이야기할때 학교교육도 마을 안에서 학교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래서 마을 안에 학교를 짓고 교육이 일어난건데, 그런데 마을에서의 학교는 분리된 공간이 되어버렸다. 공부하는 공간조차도 분리되어 버렸고. 문화공간이라고 하는 곳도 마을 안에서 문화공간이 필요했는데 문화예술이 삶과 분리되니.. 일터와 시장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공간이 공간의 역할과 패쇄성을 가지며 삶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온갖 것이 다 분리되어버린 삶의 파편화들. 이게 지금 상황에서의 어려운 문제들이 되어있는것이다.

 

- 고영직 :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시골 초등학교에 갔더니 폐교가 되었다. 자기가 다녔던 학교가 폐교되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슬픔을 안다. 학교와 마을 자체가 분리되고 방금이야기하신 것 처럼 교육 자체에 어찌보면 새로운 교육에 대해 생각한다는것은 지금 시대에서는 교육의 불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새로운교육을 생각할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와 마을이 분리가 되며 스스로 구현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것 같다. 내가 어릴때만 하더라도 셋째 형이 동생 책상하나 마련해준다고 사과궤짝 뜯어서 책상을 만들어줬다. 그때 되게 기뻤던 기억이 있다. 그게 셋째 형이 보여줬던 삶의 기술을 보여준것이다. 예술교육에서 기능교육이 불필요한건 아니지 않나. 그런 삶의 기술을. 자기가 익히고 있는 기술이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하고 자기 이웃을 생각 할 수 있는 가슴을 갖게 하느냐에 있는 것인데, 그 자체가 분리되었다. 교과과정 개편과도 맞물려 있는듯하다. 


 미국의 사울 알린스키라는 주민운동하는 아주 탁월한 사람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흑인과 관계를 맺고 주민운동을 하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같이 사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예술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이나 행정 또한 그런 식으로 변화해야 하지 않는가. 무엇을 가르친게 아니다. 그런 어떤 것이 되어야 그 이야기가 결국 이반일리츠가 이야기하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뭘 하려고 하지 말고 옆에 있어라 하는 태도. 그런 태도가 마을에서의 예술교육이 가능한 기본적인 것 아닐까. 그게 깨지면 다 깨지는것이다.

 

 

 

- 강원재 : 교육의 불가능성은 분명할것 같고, 점점 그 부분이 명확해지는듯하다. 그러면 대안이 무엇인가 하고 물을때 이렇게 생각을 바꿔보면 뭔가 보이는것 같다. 교육이라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교육이 필요하다는것을 안다. (이것 역시도 삶의 역설이고 모순이지만) 그럴때 교육이라는 것을 학습자가 스스로 주도하도록 하는 것으로 바라보자. 이러면 교사의 역할이 달라질 것이고, 우리가 교육이라고 이야기 할때 현재의 거부감도 사라지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은 든다. 지금은 교육이라는걸 사람들의 삶(삶의 고민과 문제)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학습자가 스스로 주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고민과 동기로부터 출발할수밖에 없다. 그럴때 한사람 한사람의 학습자가 자신의 문제와 고민으로부터 그것을 배우고자 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일어날때 교사가 역할을 하는 방식을 생각해본다. 앞으로 문화예술교육은 이렇게 작동하도록 만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 드라마고 : 존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것 같다. 사람이던 선생님이던. 지금 이야기의 전제를 형성해야 할것 같다. 존재가 중요하다. 사람, 선생님이던 그 존재가 규명되어야 한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는 강사를 만나긴 하지만 저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현실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더라도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 박형주 : 자연스럽게 관계의 이야기가 학교와 사회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문화예술교육의 출발 자체도 지역과 장소 기반 프로그램이었다. 어느순간 사회문화예술교육이라는 타이틀로 정리가되며 공간으로 들어가는 프로그램으로 세팅이 되고 규격화된 활동으로변했다. 그렇다보니 생산적 대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라 무언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으로 점점 변하고 있다. 이런 형태로는 아무리 문화예술교육이란 형태로 마을만들기 안에 들어가도 결국 허상일수밖에 없다. 오늘은 학교까지 가기엔 길고, 그렇다면 초반에 그렇게 시작했던 것이 규범화 되며 점점 하나의 틀이 정해지긴 했는데 이게 어떻게 다시금 장소기반. 또는  지역 마을 안에서 학교와 연동된 문화예술교육이 가능할 것이냐. 이런 부분을 생각할때 하나의 힌트가 존재인것 같다. 또 하나는 교육과 배움의 문제인듯 하다. 배움은 교육이 전제되지 않다하더라도 일어날수 있는데 배움이 전제되지 않은 교육은 어려운것 아닌가. 그런 형태를 만들기 위한 대안 혹은 단계별로 필요한 작업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

 

- 드라마고 : 한 인간은 스스로 살고자 한다. 스스로 자기를 형성하고자 하고 잠재적으로 본질적으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변에 존재하는 환경을 통해 자기가 필요한 학습이나 관계, 상호작용 등을 스스로 탐구하려고 한다. ‘그’가 ‘그’로써 살아가기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

 

- 고영직 : 윤재철 시인의 『거꾸로 가자』 시집에  「지금도 물레 돌리는 옹기장이를 보며」라는 시가 있다.

 

지금도 물레 돌리는 옹기장이를 보며(윤재철 作)

 

어릴 적은 늘
무언가를 만들며 놀던 기억
개천 얼크러진 풀섶 안
조대흙 파서
신라시대 토우 같은 인형도 만들고
비행기나 탱크 같은 전쟁의 기억도 만들었지

어릴 적은 늘
무언가를 만들었다네
자치기 깎고 새총 만들고
비석치기 돌 다듬고
밀짚 수수깡으로 여치집 만들고
관자 쪼가리 뚝딱여서
비둘기집 개집도 만들어주었지

그러나 지금은
내가 만든 기억이 없네
아무것도 만든 기억이 없네
땅도 없고 연장도 없지만
그냥 싼 돈으로 사서
모든 것 쓰고 버리기 바쁘다네
자족과 상상의 아무 기억이 없다네

 

 시의 세번째 연에서 나오는 “자족과 상상의 기억”이라는게 어쩌면 예술교육에서 지향하는 바가 아닌가한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생각하는 교육을 하자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학생이 무엇을 배울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교육의 방법론의 차원으로 학습자의 주도적학습을  이야기한것 같다. 이런 교육 행위가 마을에서 예술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포인트인데, 마을에서 어떤 희망을 갖는다고 하는게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마을에 관한 어떤 믿음 자체를 깨야하는 것이 아니냐.. 라는 이야기와 맞물려있는것 같다. 기존의  마을, 예술교육이 만날때.. 생각하는 막연한 것이나 기존에 클래식하게 해온 관성을 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 방담회 순서

#0. 프롤로그 : 마을에서의 교육을 사유하다  [Click!]

#1. 마을에서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Click!]

#2. 삶의 기술을 담은 문화예술교육 '장소'로서의 마을에 대해 생각한다 [Click!]

#3. 나오기 : 마을에서의 '경험교육'이 가능하려면, [Click!]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

 

지지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