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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첫 방담회는 “마을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진행이 되었습니다. 마을이라는 곳에서 문화예술의 역할과 의미를 짚어보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생활협동조합 퍼포먼스 반지하의 '드라마고'씨를 중심으로, 지지봄봄 편집위원이 함께 마을과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나눈 생생한 기록, 만나보시죠!

 

좌담 :  드라마고(*닉네임, 생활협동조합 퍼포먼스 '반지하' 활동가), 고영직(문학평론가), 강원재(OO은대학연구소 1소장), 박형주(하자센터 기획부장)

 

 

 

#0. 프롤로그 : 마을에서의 교육을 사유하다 : 마을에서 살아가기 위한, 마을에서 함께 살기 위한, 마을에서 죽어가기 위한 문화예술교육

_방담회 발제문 함께 읽기

 

 

- 박형주 : 가볍게 이야기하는 자리인데 말문을 터주시라고. 먼저 드라마고가 이야기를 해주시면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하고 있다. 먼저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좋겠다.

 

- 드라마고 : 제가 보내드린 발제문의 내용은 제목에 연결되는것 같다. 마을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막연한 질문은 아니다. 마을에서 반지하가 13년 정도 되었다. 지난 2007년부터 2012년 3월 까지는 완벽히 거주하면서 지역활동을 했는데, 주민들과 반찬도 나눠먹고 식사도 같이 하고 집도 고쳐주고, 보일러 파이프 고쳐달라고 하면 가고, 문짝 고쳐달라고 하면 가고.. 뭐 그런 행복했던 시절이었는데, 그 시절이 계속 될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을 연속할수가 없었다. 지역에 다른 단체가 많이 들어온 데다가 관광객이 너무 많이 들어왔다. 사무실이 전면유리로 된 컨테이너 건물이었는데, 아이가 생겨서 아이가 그 공간에서 놀고 있으면, 메가폰으로 어떤 곳인지 설명을 하면서 아이가 노는 모습을 구경을 했다. 몹시 불쾌했다. 사람을 끌어드리는 사람들은 좋은 의도로 불러들인건데, 그걸 당하는 입장에서는 당하고만 있을수 없는 그런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작년 초에 다시 옆동네로 이사를 하고, 그 동안 마을 활동을 했던 공부방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주민들과 재개발 워크숍을 하거나 때론 그런 문제로 인해 재개발의 문제와 마을 문제로 10여년 동안 전국에 친구단체를 만나고 다녔던 경험이 마을에 정주하는 것이 최후라고 생각했는데, 안된거다. 삶의 정주라는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어서 극장상영까지 하면서도 그 동네를 떠날수 밖에 없었던 지금의 상황을 고민하고 정리하는 상황이다. 그런 입장에서 써졌다는 것을 알아주시면 좋겠다. (이하 발제문)

 

  한 개인은 두 부모로부터 태어난다. 오랫동안 그래왔다. 그래서 한 사람의 탄생은 인류의 씨앗들이 연속되고 있는것이다. 오랜 인류의 씨앗 속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의 자궁 속을 벗어났지만 그는 그의 가족과 이웃들이 속한 문화속으로 들어왔다. 막연한 독립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속한 문화로 들어왔다. 그 어머니가 먹는 음식이 아이에게 먹여지고, 그의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로 소통하며, 그가 다니는 공간과 풍경들에 담긴 역사와 문화는 그의 삶의 환경이 된다.


  한 아이의 성장발달 과정은 신체적 성숙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필수한 삶의 조건을 학습하는 과정이다. 살기 위해 학습한다는 것이다. 살려고 태어났으니 아이들은 일어서려하고 말하려고 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쁘고 깜찍한 짓이 아니라  살기 위한 절대절명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만나는 자연, 인공의 사물을 접촉하고, 자신과 공존하는 사람들을 파악하고 교감하고, 자신의 필요와 타인과의 공존을 위해 노동하고 자신의 욕구와 자기 존재를 탐구하고 표현하는 활동은 지속되어 갈 것이다. 이게 다 절대절명으로 필요한 삶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신체를 갖고 있고, 지난 인류가 그랬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죽게된다. 한정된 수명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을 실현하고 사랑하며 다음의 세대를 생산하는 활동을 구성해 가고 있다. 청년들은 곧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새대들이 태어나는 순환의 과정을 체감할것이다. 인생은 순환되는거라는걸 느낀다는 것이다. 자신의 지나온 시절과 앞으로의 삶의 의미를 가늠하기 위한 사유에 빠져들것이다. 한없이 질주할것 같은 삶이 어느순간 순환된다는것을 느꼈을때 사유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애는 영아기에서 아동기에 이르는 폭발적인 성장과 10대의 자기 정체성과 인간세계에 대한 탐구, 20대의 열정적인 경험과 사랑, 30대의 노동을 통한 사회활동의 점착, 40대의 양육과 부양의 중대한 의무감과 자신의 일에 대한 숙련 추구내지는 사회적 요구, 50대의 노동과 사회에 통찰과 가치있는 사회활동의 탐색을 통해 가치있는 활동을 한다. 60대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수용에 기반한 새로운 독립의 추구, 70대 이후의 삶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정리하고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는 시기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성장과정에서 연령대 별로 부각되고 요구되는 것이 결핍되었을때 결핍을 회복하지 않으면 다음의 생애시기에 혼돈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20대때 충분한 사랑의 경험이 없으면 30대때 혼돈이 찾아오고, 40대때 양육과 부양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지 못하면 나중엔 다음 세대가 없거나 부모와 갈등이 생길수 있고.. 마을은 일정한 문화적 영역에서 한 아이의 성장발달이 요구하는 사물과 사람과 공간과 기호들의 위치하여 전면적 성장의 환경으로 작동되어진다. 아이가 절대절명으로 살아야 하기때문에 만나는 사람, 여러가지 기호들. 기호를 언어적 측면으로 볼수도 있고, 제스춰, 문화가 만들어놓은 규칙들. 인도와 차도라던지. 그런 규칙들, 이 모든것들이 아이가 전면적 인간으로 살기 위한 행동으로 작동한다. 이것은 사회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는 아이가 전면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 존재 자체가 전면적 성장을 위해 환경 자체를 전면적으로 만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어른들이 티비를 많이 본다고 우려한다거나, 사물을 너무 집중해서 보고 있으니 그만한다고 하는거라거나 이런식의 것들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한국의 현대사는 자본주의의 독점된 경제체제로 인해 마을에서의 노동과 문화가 파괴되고 더 많은 소득을 위해 노예들이 되어서 원거리로 이동하는 노동과 대중상품의 소비로 위로받는 삶의 방식을 대중화 시켰다. 우리 대부분 그렇다. 나도 밖에서 벌지 않으면 살수가 없다. 평범하지 않게 쇠락하는 마을과 평범하지 못해서 쇠락하는 마을이 많아졌고, 그 마을을 벗어나 비범한 소득과 소비를 이룩할 수 있는 곳으로 이주하고 싶은 욕망들이 있다. 아이들도 그렇고, 주민들이 그곳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런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냐면, 마을과 관계를 외면한 학교교육이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도 그렇다. 지역사회 과목이 거의 없다. 특히 지방대학이나 이런데는 더 많아야 하는데 그런게 없다. 그리고 7차 교육과정 이후에 지역사회 학습에 대한 내용이 초등학교에도 존재하긴 하지만 여전히 단절이 풀렸다고 볼수 없다. 그리고 앞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심각한 경쟁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이웃을 활용하는 추악한 정치활동으로 재생산 된다. 삶의 전면적인 전개가 이뤄지는 마을에서 이웃들의 관계는 소득을 증대하기 위한 파트너쉽과 특정 정치세력의 대리전의 비겁한 현장으로 변이되었다.

 우리의 문화활동과 문화예술교육의 활동들은 지금 이 마을을 대상으로 활동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의 주체들은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생애에 대한 철학, 현재의 파괴된 마을의 현실과 그 원인을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조건을 성찰해 내는 활동을 구성하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문화예술교육을 실행하는 주체들은 대부분 그 마을에 거주하지 않거나 그 마을의 역사와 문화의 환경을 함께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거주하면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거주하지 않아도 대면하려고 하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와 나라는 개별적인 상호작용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동네에서 길에 있는 할머니를 만날때 일대일로 만난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어디가세요?”하면 “어 안녕, 어디가.” 이런식으로 일대 일로 대면하는데,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 내지는 지원사업의 형태로 만나면 사람들을 일대일로 만나기가 힘들다. 집단과 개인이 만나게 되거나 특정한 개인을 개별적으로 보지 못하고, 특정 집단의 일부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마을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준비된 프로그램은 타지의 특정한 집단이라는 규정된 정체성의 마을을 대상으로 삶의 전면성을 외면한채 특정한 즐거움이나 특정한 학습이나 특정한 행위나 특정한 이상을 여전히 미래적 가치로 포장한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현재의 삶을 나누지 못하고 이걸 배우면 즐거워진다거나 잘하게 된다는 미래적 가치로 포장시켜서 그들을 수업에 참가시키고 그것으로 성과를 가져간다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현장적이지 못한 포장된 성과로 처음부터 규정짓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왜냐면 계획서를 그렇게 짜게끔 되어져 있다. 이게 엄청 큰 문제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조건은 마을의 노동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일하고 마을에서 가르치며 마을에서 함께 살기를 꿈꾸지만, 이렇게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마을에 가게를 열고 있거나 할일이 없어서 마을에 머물거나 어쩔수 없이 마을에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부모들의 빈약한 삶의 현실로 인식되고 있다. 대부분의 문화예술교육자들은 그 마을에 살지 않으며 여러 지역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 현실이다. 문화예술교육 활동의 대부분은 자신의 예술행위가 예술가이자 교육자였을때, 자신이 속한 문화에서 펼쳐지고 소통되는 것에 대해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 활동으로는 자신의 생계와 지속적인 창작이 불가능 하다는 경험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전에 예술행위가 마을에서 펼쳐져서 먹고살수 있고 지속가능하다는 인식이 없다는것이다. 그런 활동을 배우지도 못했고 그런 환경을 만날수도 없었고. 심지어는 예술이 독특하고 비범하다는 것에 너무 천착해 있었다. 우리의 가족과 이웃은 이것을 이해하고 소통할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인식이 10여년전까지 문화예술교육이 활성화되기 전까지 우리의 문화의 생각인것 같다.


 이 생각은 아직 시효가 남아있다. 지금도 마을의 예술, 문화, 교육의 활동들은 여전히 비범한 사람들의 활동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나 다 할수 있다거나 주민이 다 할수 있다고 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문화적인것이고 살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우수한 사람들이 모자란 사람들을 대상으로 훌륭한 예술도 선보이고, 어려운 지식교육을 받을 복지도 제공하고 있다.

 

 문화예술강사들이 현장까지 내려오고. 공공예술지원 하면서 작가들이 제도의 의도로 해석해야 하는 을의 입장이 생기고, 이제는 마을운동까지 그 어떤 단체의 대표라던지 특정 사람들의 하부에 다른 노예적 노동자들이 생기고 있다. 마을은 돈이 없어도 자유로운 곳이고 일대일 만나는 곳이었는데. 일대일로 만나지 못하고 주민들을 프로젝트에 활용하면서도 그런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있다.

 

 문화예술교육이 마을에서 활동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곳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그 마을의 역사와 문화라는 환경, 한 사람의 성장과 발달과정, 주민들의 사회생태, 마을에서의 노동과 공동체 활동, 마을의 공간성과 장소성, 인간의 생애와 동시대의 공존에 대한 자기 사유와 성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상지 마을에 대한 탐구를 매번 진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그와 같은 문제를 직면하고 사유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누구나 스스로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잠재된 욕구가 있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만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공동체 문제에서 어려운 것은 스스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들어오면 공동체 전체가 고통스러워진다. 공동체의 전제조건 중 하나가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살아낼수 있기 위해 공동체 활동을 하거나 그런 준비가 된 사람이 공동체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단독된 삶이 가능한 성장과정과 사회적 관계를 지닌 사회여야 우린 모든 삶과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인 자기 형성과 더불어 이뤄지는 삶의 과정을 획득할 수 있다.

 

 한 마을이 이것의 완결된 환경이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더 진화하고 더 선명한 삶을 살기 위해 이사할 수 있다. 자연을 관찰할 수 있고, 삶을 성찰하는 이웃들이 있으며,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밤길이 안전하고 소박하지만 함께 일하고 그 일을 함께 기념하는 잔치가 있는 곳이라면 저라도 가고싶다 하지만 갈 수 없습니다. 그런 곳이 어딘지 잘 모르겠다.(웃음)

 

 모든 우리 인생은 어차피 역정속에 있다. 러시아 교육학자 비고츠키가 이야기 한 내용을 옮긴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 인생의 역정 속에 있어서 교육을 표준화 시킨다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자신의 생활적 노동을 소중하게 수행해야 한다. 전면적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웃들에 대한 위로와 존중을 표하고, 하나의 사물과 하나의 표현과 하나의 의미를 대화하여 가는 것이다. 오늘 하루 생존을 위한 기술을 활용하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지혜가 동원되었다면 보람찬 하루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살아남기 위해 내가 어떤 기술을 동원했느냐. 밥, 청소, 모기장을 칠수 있느냐, 누군가 건널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을수 있느냐. 이런 생존의 기술을 활용했다면 보람된거고 그런 것들을 배웠어야 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한 사물과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여 가는 교육이 필요하다.


 2000년도 후반쯤에 대안교육쪽 한분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가 대안교육한다고 아이들에게 많은걸 가르쳤는데 뭐가 남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예를 들어 한가지에 대해서만 1년 내내 가르쳤으면 뭔가 성과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감자던 꽃이던 하나를 가지고 탐구를 하면 역사, 문화, 성분, 모양, 음식, 이것이 어떻게 유통되는지, 이것으로 만들어진 시, 영화,굉장히 많은 것을 다룰 수 있었을텐데, 하나에 대한 것을 탐구하지 못하고, 굉장히 복잡하게 이 아이의 삶의 대안과 사회적 대안을 다 가르치려고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한적이 있다. 그런게 아마 지금의 문화예술교육이 주는 메시지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표피적이거나 단편적이다. 9시 뉴스랑 같다고 보시면 된다. 예를 들면 첫번째 뉴스는 증권 조작에 대한 뉴스 두번째는 삼성전자 매출이 얼마나 올랐는지 나오고, 그다음은 연탄배달을 해주는 복지활동이 나온다. 이게 연결이 안된다. 기업의 주가 조작과 독점적인 자본과 그래서 생기는 빈민들의 관계망을 설명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굉장히 많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단편의 연속이 아니라, 단면을 통찰하거나 통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직업과 노동이 노예되지 않게 하고, 온전히 자신을 저해하는 나쁜 정치와 싸워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문화와 예술과 교육은 인간의 전면성과 단독성을 기반으로 공동체의 창조적 해석을 풍요롭게 해야한다.

 

 그것이 확인되어져야 공동체에 대해 창조적으로 해석하고 참여할 수 있다. 인간의 전면성과 단독성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 프로그램에 단편성으로 관계되고 교육되고 성과로 규명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죽는 날에도 이런 이야기들로 장례가 채워질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도 이런 이야기를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가난하더라도 삶의 전면적인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 방담회 순서

#0. 프롤로그 : 마을에서의 교육을 사유하다  [Click!]

#1. 마을에서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Click!]

#2. 삶의 기술을 담은 문화예술교육 '장소'로서의 마을에 대해 생각한다 [Click!]

#3. 나오기 : 마을에서의 '경험교육'이 가능하려면, [Click!]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

 

 

지지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