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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봄봄 두 번째 방담회 : 미적 교육

 

1. 미적 교육이란 무엇인가? 왜 주목해야 하는가?

 

 

 

 

박형주 : 방담회 사회를 맡게 된 박형주입니다. 얼마 전에 시사IN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도 보니깐 ‘방담회’를 진행하고 있어서 유심히 본 적이 있습니다. 일명 대선주자들 ‘뒷담화’ 방담회였는데 심각한 이야기 보다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가볍게 이야기하는 ‘작업’들이 재미있더라고요. 오늘도 그렇게 가볼까 합니다. ‘미적 교육’이라는 게 딱딱한 주제긴 하지만 이론 이야기만 하기보다는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꼭 학자들이 웹진을 보기보다는 현장에 있는 분들이 많이 보시기도 하거든요. 이 기획을 보며 현장에서도 한번쯤 생각하고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유분방하게 이야기하는 분위기면 좋을 것 같고요. 저도 개입이라기보다는 이야기 나누는 한 사람으로써 참여한다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다만 ‘미적 교육’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출발해야 할지 잘 감이 안 잡히는 점은 있는데요. 그래서 먼저 교사 입장에서 현장에서 종사하고 계시는 김인규 선생님의 글을 간단히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 글, 그리고 김인규 선생님의 이야기를 먼저 들으면서 교육 이라는 단어 앞에 있는 ‘미적’이라는 것이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미적 교육의 이론은 무엇인가? 왜 주목해야 하는가?

 

 

김인규 : 안녕하세요. 김인규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요청을 받고 나눠드린 글 첫 페이지에다가 교육 관련해서 좌파, 우파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었는데, 전교조 등의 교육단체 등에서 늘 교육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잖아요. 교육 방법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데, 현장에서 아이들하고 쭉 같이 해오면서 느껴본 결과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어요. 예컨대 전교조의 경우, 아주 ‘간단’하게 해법을 내놓잖아요. 즉 ‘지금 현재 입시교육이 치열하다. 이것은 개인주의가 만연한 탓에 개인 간의 무한경쟁을 부추기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공동체를 가르치고 더불어 사는 교육을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해요. 한편으로 교육부 쪽에서는 늘 ‘경쟁력’을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 시켜야 하는데 함께하는 교육이 개인을 극대화시킬 수 있느냐’는 거죠. 이렇게 서로 평행선을 그어가죠.

 

 그런데 제가 아이들과 20년 가까이 살면서 느낀 건 뭐냐면, 이건 어쩌면 개인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에서 ‘입시’라는 하나의 목표로 아이들을 몰아가면서, 거기서 적응 못하고 낙오하는 아이들은 자기발전에 손해가 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대학을 가야 하는 ‘학교공동체의 훼방꾼’으로 생각을 하더라구요. 즉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립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하나의 목표 안에서 모든 개인을 몰아넣고 휘두르는, 오히려 특정한 공동체성이 무시무시하게 발현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이런 생각을 몇 년 전부터 쭉 하기 시작했어요.

 

 예술도 그래요. 예컨대, 2000년대 초반에 시각문화교육이 등장해서 지금은 굉장히 일반적인 사례가 되었잖아요. 저도 열심히 참여를 하고 작업을 진행해왔는데, 지금에서 보면 그것도 어찌 보면 하나의 기능적인 차원에서의 목표인 것이지 우리 교육 근간을 접근하는 핵심개념이 될 수는 없다고 봐요. 그렇게 보면 ‘미적 교육’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오히려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쉴러의 『미적 교육에 대한 서한』 은 이 개념을 아주 잘 표현한 책이죠. 편지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게 두 가지 이야기예요. 하나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도구이성’으로 전락하는 기능화된 인간의 문제, 그리고 문명화되기 이전 자연 국가 속에서의 ‘맹목성’에 대한 것.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발현하는 문제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죠.

 

 쉴러는 근대혁명 이후 벌어진 다양한 사태에서 인간이 도구이성의 기능적 존재로 전락했다고 이야기하고, 그로부터 벗어난 ‘미적 인간’이라는 것을 교육적 이상으로 이야기했어요. 미적 인간은 그야 말로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욕망의 맹목성’과 도구이성의 사유에서 오는 어떤 ‘인과관계의 목적성’ 이 두 개가 서로 교차될 수 있는 지점에 있죠. 목적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즐거움의 세계. 욕망은 즐거움의 세계이고 인과성은 목적성의 세계인데, 이것이 ‘즐거움의 목적성’으로 합쳐지는 순간 미적인 영역이 도래하고, 비로소 자유로운 ‘미적 인간’이 탄생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굉장히 큰 공감이 갔어요. 그동안 학교에서 공감해왔던 것들에 굉장히 가깝게 가 있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부딪치는 자기 고만의 세계와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애들이 그런 (욕망과 즐거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거든요. 근데 그 고민을 담아내주는 어떠한 교육적 접근이 현장에서 약한 거예요. 물론 주로 전교조쪽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고 놀고 해주는 교육에 관심을 많이 가지기는 하죠. 그런데 그 것을 개인의 어떤 자기존재성의 문제로 풀기 보다는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공동의 과제를 풀어가는 데 초점을 맞춰서 접근을 하니까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현재의 문화예술교육은 장르 교육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박형주 :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미적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최근에 교육과학기술부 쪽에서는, 물론 ‘경쟁’도 이야기 합니다만 상반되게 또 ‘창의인성’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를 키우기 위한 도구로서의 미술교육을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근데 그게 한 인간의 존재의 이유와 배움에 대해서 묻지 않고, 하나의 목표치만 설정해서 그저 그걸 채우기만 하는 것처럼, 현재의 미적 교육이 서 있는 게 아닌가는 생각이 들어요. ‘도구적 이성’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학교 현장에서 미적 교육론은 적용 가능한가?

 

 

 

현광일 : 쉴러의 미적 교육이라고 하는 게 학교 교육에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은 들어요.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쉴러의 개념은 학교를 전제했다고 보기에는 한계도 있어요. 당시 계몽주의와 혁명의 시절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인간의 문제를 논하면서 나왔기 때문에, 그 관점에서 현재 공교육을 들여다 본다면 조금 복잡해지는 것 같아요.

 

 쉴러의 이야기, 그 당시에서 ‘도구이성’과 ‘맹목성’이라고 하는 욕망의 문제는, 사회적 계층으로 보면 부르주아 식자층과 기층민들에게서 나타나던 문제인 거잖아요. 농촌에서 도시로 막 이주해 온 계층의 욕망과 무질서. 그리고 부르주아 층들의 성장과 도전의 기회에 대한 고심. 이런 모습들 사이에서 사회적인 괴리가 존재했던 것이죠. 위화감 같은.

 

 계급적 분리가 심화되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 비전과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매개도구로서의 ‘미적 교육’을 내세우기 때문에 저는 쉴러를 그 당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유일하게 ‘평등’의 문제를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독해를 했어요. 여하튼 ‘자유’의 문제는 많이 이야기 되었던 반면에 ‘평등’이란 이야기는 그 보다 나중에 나왔죠. 그런 면에서 고도의 평등, 더불어 사는 것을 중시했던 것이죠. 그런 생각에서 쉴러는 ‘차별’ 자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의 ‘미적 교육’의 문제를 제기했고, 그것을 통해서 개인이 좀 더 실제적으로 자유롭게 갈 수 있지 않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 사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창의 인성’과 같은 이야기들은 쉴러를 통해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우리 사회가 극단적으로 위계화 되고, 지역적으로 분할되어 있잖아요. 사람들은 자그마한 것에도 ‘차별’을 느끼죠. 이러한 부분들은 경제적인 재분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가능한 지점이죠. 즉 새로운 인성의 형성, ‘미적 교육’의 문제 자체는 이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새롭게 재기되어야 하고, 이에 대해서 문화재단, 또 공교육 기관이 고민해야 하지 않나,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김인규 : 요즘 학교에서 왕따 문제가 굉장히 시끄럽잖아요. 단적인 이야기 하나를 해보면, 애들이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죽음’이예요. 특히 여학생들은 더 그래요. 학교 안에서 혼자 밥을 먹으러 가야 되는 상황이면 밥을 안 먹어요. 왜냐면 혼자 식당가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치욕적이고 무서운 순간이기 때문인 거예요. 누군가와 같이 몰려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밥을 먹지 않아요. 그 ‘그림자’. 굉장히 무서운 감옥인 거예요. 사실 혼자 밥 먹을 수도 있고 혼자 놀 수도 있는 거잖아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건데, (아이들은)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가 있는 거고 곧바로 이지메의 대상이 되는, 그런 정신적인 양상. 저는 이 문제는 단순히 공동체성이나 질서, 인권문제의 차원과는 다른 정신적인 배경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공동체성에 대한 문제

 

 

 

현광일 : 저는 이제 개인과의 대척점에서 공동체를 논하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해요. 입시공동체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은 공동체는 이미 전제되어 있는 거예요. 그 안에서 공동체의 동력을 엘리트주의로 할 것인지 다른 것으로 할 것인지가 논의의 지점인 거죠. 이는 사회의 중심적인 담론과도 맞닿아있죠. 즉 엘리트가 공동체를 끌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공동체가 어떤 다른 원리로 가는 것인지 하는 논쟁. 즉 공동체의 동력을 어떻게 삼을 것이냐는 논쟁을 바꿔야지 이것을 계속 개인과 공동체를 대척점에 놓는 방식으로 푸는 것은 잠정적으로 사람들을 공동체(편)으로 몰리게 하는 의견의 왜곡을 낳을 뿐이죠.

 

 사실 우리가 잘 들여다보면 방금 말씀하신 (밥 먹는) 문제 같은 것처럼 엉뚱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잖아요. 공동체 특유의 폐쇄성이 있는 거고, 그것을 유지하는 또 다른 문화들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과 공동체라는 논법을 벗어나서 공동체라는 것을 어떻게 육성해 나가야 할 것이냐 라는 문제와 관련한 쟁점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많은 이데올로기들은 그 속에서 매일 비슷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라도’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두 번째 방담회 내용


첫 번째 이야기 : 미적 교육이란 무엇인가? 왜 주목해야 하는가? [바로 가기]

  

          - 미적 교육의 이론은 무엇인가? 왜 주목해야 하는가?

          - 현재의 문화예술교육은 장르 교육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 학교 현장에서 미적 교육론은 적용 가능한가?

          - 공동체성에 관한 문제

 

두 번재 이야기 : 미적 교육. 현장의 균열과 한계, 그리고 아이디어 [바로 가기]

 

          - 현장에서 바라보는 미적 교육이란 무엇인가?

          - 학교라는 현장의 '균열'

          - 미적 교육에 대한 공교육의 불가피한 한계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 그냥 놔둬도 되는데 '일부러' 가르치고 있다

 

세 번째 이야기 :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것. 그 방법과 현장의 환경 [바로 가기]

 

          - 자기결정성은 무엇인가? 어떻게 유도할 수 있는가?

          - '본베 교육'이 사라진 때, 아름다움도 '기본'은 가르쳐야 한다

          - 교육이 근대적 훈육개념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은 하나의 '오해'

          - 학교 교육 현장에서의 미적 교육의 '가능성'

          - 보편적인 차원에서는 '기능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어

 

 네 번째 이야기 : 교사들에게, 그리고 '학교 밖 마을'에 대해서 [바로 가기]

 

          - 연수나 교육 현장에서 교사들이 반영했으면 하는 점

          - 관료화되어 있는 학교의 한계, 그리고 '마을'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

 

 

 

지지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