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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같이 존재한다.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괴물적 본성인 하이드 씨는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위계질서의 배합에 따라 언제든지 출현할 수 있다. 국가, 종교, 계급 같은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그런데 국가, 종교, 계급 같은 구성요소들 가운데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나의 정체성을 절대화할 때, 나와 다른 타자와의 충돌, 대립, 갈등, 분쟁, 전쟁은 피할 수 없다. 하이드 씨가 출현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레바논 출신의 저널리스트 아민 말루프는 그런 정체성을 ‘사람 잡는 정체성’이라고 정의한다.


 정체성 구성의 ‘배합’을 바꾸는 (예술)교육 과정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교육에서 모든 사람은 서로 같다는 사실이 아니라 ‘각 개인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각 개인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처지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는 사유의 근육과 열린 심성(心性)을 기를 수 있는 감정교육이 요구되는 것이다. 타자의 문화와 문명을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는 미적 교육 혹은 문화교육이 요구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미적 교육은 필연적으로 내면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다른 곳을 사유하려는 여행자의 순례 형식으로 드러난다. 글로벌화한 지구문명 시대에 이러한 상상여행이 갖는 의미는 퍽 크다. 통행, 이주, 이동, 이산, 혼합, 전환 같은 문화변동의 조건들이야말로 지구문명 시대의 문화와 문명의 새로운 미래를 구성할 수 있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문화변동의 시대에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문화 간 소통과 문명 간 대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 사는 지구촌의 미래는 안녕과 평화가 공존하는 지복(至福)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희망해 본다.

 

 

 <2012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사업으로 서수원 희망샘도서관에서 진행되는 [예술로 배우는 인류 원(原)문명]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은 지금 옛 고대(古代) 문명을 사유하고 상상하고 있다.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 등 세계의 4대 고대문명사 공부를 하고 있다. ‘일각수 황소와 맴돌이 놀이판’ 수업에 참여한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의 얼굴에는 특유의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이들의 그런 해맑고 진지한 표정에서 “다른 공기를 마시는 희열”(몽테뉴)이 느껴진다. 그런 희열은 발견하는 기쁨에서 비롯하는 것 아닐까. 문명의 탄생 과정과 문명 간 차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차이에 대한 개방성을 갖게 한다. 우리는 문명에 대한 문해(文解)교육을 경험한 아이들이 타자에 대해 열린 정체성을 구성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예술교육을 해야 한다.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보정(補正) 연대를 B.C.11000년으로 추정하는데, 이에 따르면 인류는 13000년 동안 저마다 고유한 문화와 문명을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문명 간의 차이는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 그러나 ‘1500년’ 이후 세계사를 보면, 이러한 문명 간 차이는 유럽의 근대문명이 주도하는 식민지 쟁탈 각축전에서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문명 담론으로 활용되었다. 문명 간 차이는 ‘격차’로 취급되었고, 이에 따라 인종의 ‘차별’과 정치․경제적 ‘불평등’이 합리화되었다. 유럽중심주의의 해악은 우리의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차원에서도 여전히 작동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B.C.11000년~A.D.1500년에 각 대륙의 발전 속도가 제각기 달랐던 것이 곧 1500년의 기술적․정치적 불평등을 낳은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가 학계의 정설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고대 문명사를 배우는 아이들의 예술교육 현장에서 서구인이 규정한 이런 식의 역사 일반화는 인종주의적 편견을 유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땅히 주의해야 한다.

 

 아이들이 서양의 신화와 문명과 역사를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역사에 대한 깊은 공부와 함께 역사적 사건을 해석할 수 있는 교수자의 안목과 내공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십자군을 말할 때, 십자군 정신을 뒤집어버린 성배(聖杯) 신화를 같이 배우는 식이다. 그래야 유럽중심주의의 해악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영국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자서전 『마음의 진보』에서 이러한 역사 해석이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배를 찾는 기사가 당도하려는 곳은 예루살렘이라는 지상의 도시가 아니라 사라스라는 이 세상에는 없는 천상의 도시다. 숲은 영혼의 내밀한 영역을 상징하며 성배는 신과의 신비로운 만남을 상징한다.” 그녀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기원을 연구한 비교종교학적 연구를 통하여 1천 년 넘게 갈등을 겪어온 세 종교 간에 다리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해하지 말라. [예술로 배우는 인류 원(原)문명] 프로그램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지나친 문화상대주의에 빠져서도 안되겠지만, 우리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타자 혹은 타자의 문화에 대한 교조주의적 관점과 불관용의 태도를 갖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려는 것이다. 타자의 문화 혹은 타자의 문명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태도는 이해와 공감의 단단한 지반 위에 서야 마땅하다. 괴테의 말은 적절한 언명이 되리라 믿는다. “세계가 그토록 방대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흩어지기 위함이니.”

 

 인더스 문명을 배우는 초등학교 4~6학년 아이들은 고대 힌두교 경전 『리그베다』에 수록된 고전적 나사디야(Nasadiya), 즉 「무유(無有)찬가」를 읊조리며 생각에 골몰했다. 누군가는 “있음의 인연이 없음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는 「무유 찬가」의 위대한 가르침을 언젠가 깨닫게 되는 명상의 시간이 오지 않을까. 우리는 예술교육을 통해 그런 아이들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교육의 운명이다. 아이들은 브라흐마, 크리슈나, 비슈누, 쉬바, 아르주나 같은 신들의 낯선 이름과 저마다의 역능을 묻는 질문에도 척척 대답한다. ‘브라흐마의 생각’에서 태허(太虛)의 어둠이 걷히고 천지와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신화 이야기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되었다는 맴돌이 장난감을 직접 만드는 체험수업에서는 아이들이 저마다 부산한 손놀림을 뽐냈다. 이런 흙장난 공작(工作) 체험 등을 통해 ‘생각하는 손(무드라)’을 가진 아이로 교육해야 한다는 손채수 선생의 말이 퍽 인상적이다. 손의 기능이 ‘퇴화’한 아이들이 이웃을 향해 팔을 앞으로 뻗는 이타주의적 인간본성을 실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생각하는 손을 가져야 타자를 ‘생각하는 가슴’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수업 방식 또한 인상적이다. 교육 자체를 일종의 예술 행위로 승화하려는 ‘교육예술’의 철학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수업의 시작과 끝 사이에 진행하는 기도와 명상은 각인과 몰입을 중시하는 홀리스틱(holistic) 교육철학에서 비롯한다. 수업 재료와 좌석 배치 그리고 교육 수준 또한 아이들의 발달단계에 맞게 철저히 고려한다. 노트 필기는 허용하지 않는다. 전인성(全人性)을 갖춘 아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호기심을 최대한 자극하는 교수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문명의 기원을 배우고, 신화를 배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이들의 두뇌를 자극하여 항상 나와 세상 그리고 우주에 대해 질문을 품은 아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고대인처럼 생각하는 ‘고대인-되기’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부 경험이 각 대륙의 무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지금보다 분명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위 ‘문명의 충돌’(S.헌팅턴), ‘감정의 지정학’(도미니크 모이시)처럼 타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의 문화가 엄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문명 간 차이를 넘어 타자성을 체험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고은 시인이 「나의 유언」에서 “호메로스의 때가 가고 / 헤로도토스의 때가 오리라”고 쓴 것의 깊은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전쟁 영웅을 기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대신에, 농업과 신화를 예찬한 헤로도토스의 평화 지향이야말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근거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 시적 메시지일 것이다. 그 과정은 물론 지난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상을 향한 우리의 미적 교육 또는 예술교육 행위는 멈출 수 없다. 바로 그것이 우리 모두가 승리하는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승리를!”(Jai Jagat!, 비노바 바베)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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