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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이는 창의성의 원천이다. 상상하는 것이 힘이 되는 시대에 잘 놀 줄 아는 놀이력은 매우 중요하다. 나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공존(共存)의 사회를 위한 협동력과 감수성을 놀이 과정에서 몸과 마음으로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고 공감할 줄 아는 아이들은 ‘마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놀이문화가 사라진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다. 공부 외에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는 우리 아이들이 잘 놀 줄 아는 한 사람의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차라리 기적에 가깝다. 아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행복해지고 싶어하지만, 전 국민이 부자를 꿈꾸는 이상한 나라에 사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지금 당장의 행복을 추구할 일체의 권리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아이들의 체험마저 ‘학습’이 되어야 허용하며, 지금 누려야 마땅한 행복은 항상 미래의 시간으로 유예하도록 독촉한다. 지금 당장의 행복이 유예된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훗날 사회에 진출해서도 잘 놀 줄 모른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어른들은 먹고 사는 문제라는 경제사회 패러다임을 넘어 즐거운 반역의 유희정신이 일상화되는 문화사회(cultural society)의 꿈과 비전을 구현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만끽할 줄 아는 ‘감성지식’을 미처 익히지 못한 우리 사회가 불안증폭사회의 강박증을 앓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이다. 아이들이 몸과 마음을 다해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 사는 세상과 우주의 지극한 아름다움에 대해 ‘경외감’을 느낄 수 있는 미적 교육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미적 교육이야말로 자연과 인간에 대해 무례한 언행을 일삼는 소위 공감(共感) 무능력자들이 대량양산되는 사회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 교육이라는 말의 원래 뜻이 “아이의 탄생을 돕는다”는 것이다. 영어 ‘education’의 라틴어 어원이 밖으로 끌어낸다는 의미의 ‘에-두케레(e-ducere)’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우리는 그러한 교육의 의미를 미적 교육의 현장에서 실현해야 한다. 그러한 미적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우리는 서로를 위하여 태어났다”(키케로)는 점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도록 교육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왜 아름다움인가? 독일 시인 릴케가 『두이노의 비가』에서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한다”고 쓴 표현은 좋은 참조점이 되리라 믿는다. 저 유명한 릴케의 경구는 ‘인간은 왜 아름다움을 숭배하는가?’에 대한 자문자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릴케는 우주의 자비(慈悲)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을 시적 역설의 언어로 표현했던 것이다. 경외감은 공포의 일종이다. 태초부터 자연과 우주가 스스로 저러하게(self-so) 운행(運行)을 해온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자연과 우주가 마치 우리를 평온히 무시하듯이 운행하는 모습에서 시인은 어찌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과 아름다움을 실감했다고 보아야 옳다.


 

 자연과 우주의 질서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공감 능력은 인간 이성의 합리성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소위 근대적 인식론과는 거리가 멀다. 『방법서설』에서 한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어린 시절과의 관계를 끊을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 데카르트의 근대적 인식론은 아이들을 ‘감정’ 없는 로봇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근대 이성의 폭력성이 지난 세기에 유례 없는 문명의 재난으로 나타났다는 너무나 분명하다. 이 점에서 지극한 아름다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릴케의 경구는 감성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적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을 뜻하는 코기토(cogito)를 넘어 감성을 의미하는  ‘Sentio, ergo sum’(느껴라,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의 패러다임 전환을 표현한 셈이랄까.


 

 그런데 만일 우리가 자연과 우주를 ‘비우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철학자인 동시에 성공회 신부인 매튜 폭스는 「우주는 우호적인 곳인가?」라는 대담에서 그런 태도는 결국 ‘편집증’의 일종이며, 필연적으로 또 다시 ‘근본주의’와 ‘파시즘’이 자랄 토대가 된다고 경고한다. “근본주의나 파시스트 정치는 같은 것입니다. 이 둘은 두려움을, 남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을 이용하는 겁니다.” 인간이 지금처럼 삶의 뿌리로부터 이탈한 적이 없는 시절에, 스스로 그러한 자연과 우주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감과 존경심을 가져야 함을 역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살아 있는 자연과 우주의 존재를 소위 기계로 언어화하는 현상이야말로 눈앞의 생생한 실재를 모독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과천 연극놀이터 ‘해마루’(대표 박정열)의 예술교육 프로젝트 [돌멩이에서 피어나는 연극놀이]는 우리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놀이와 연극놀이를 적절히 결합한 이 프로젝트는 아이들을 위한 감성교육인 동시에, 문명의 패러다임을 변환하려는 생명평화교육의 속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이들을 시인과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학교 교육이 아니라 위대한 자연이다. 지금 당장 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가 흙과 함께하며 자연의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도록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천 해마루의 예술교육 프로그램 [돌멩이에서 피어나는 연극놀이]에서 소위 미적 교육에 대한 작은 희망을 갖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무엇보다 놀이를 통한 즐거운 반역의 유희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의 미적 교육 혹은 예술교육의 문제는 ‘계몽하지 않는 계몽’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학교 안팎의 교육 현장에 도입된 교육연극(T.I.E) 프로그램이 교육적 목적성을 강조한 나머지 계몽을 강조하는 소위 근대교육의 역설에 빠진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교육적 계몽의 무용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위한 미적 교육에서 시와 예술 자체의 무용성(無用性)이 주는 ‘즐거운 계몽’의 유희정신을 십분 살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이 ‘쓸모없는’ 무용성을 갖는다는 바로 그 속성 때문에 이 세상에 ‘쓸모’가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쓸모없음의 참다운 유용성(有用性)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해마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의 표정은 더없이 해맑고 명랑했다. <이런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주제의 연극놀이에 참여한 아이들은 저마다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말라죽어가는 ‘생명나무’를 살리는 방안이 무엇인지 궁리하느라 분주했다. 아이들의 이러한 모습에서 옛 소련의 영화감독 A.타르코프스키의 묵시록적인 영화 <희생>의 첫 장면이 연상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롱테이크 기법으로 찍은 <희생> 첫 장면에서 말라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한 노인의 모습을 영상에 아름답게 담은 바 있다. 노인의 행동에서 어떤 간절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어쩌면 재앙에 가까운 지금의 문명에 대한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그런 절실한 마음이 없고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담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사는 지구별의 생태계 파괴에 관한 한, 미적 교육 현장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물론 즐거운 반역의 유희정신은 미적 교육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일본 생태사상가 마사키 다카시는 『나비문명』에서 지금의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로 지탱되는 파괴적 자본주의 문화를 상징하는 ‘애벌레 문명’에서 환골탈태하여 새로운 ‘나비 문명’으로 방향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자연에서 떨어져 나온 현대인이 존재 기반인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그라운딩(Grounding, 회귀)’이라고 말한다. 나무를 심고 숲을 만드는 기쁨을 역설하는 그의 심오한 생명평화사상은 아이들을 위한 미적 교육 현장에 좋은 참조점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것을 인간 편이 아니라 숲의 편에 서서 보려는 아이들의 열린 감수성이야말로 문명 전환을 예감하는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감수성과 공감 능력을 갖춘 아이들을 미적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과천 해마루 아이들의 모습에서 미적 인간의 탄생을 나는 예감한다.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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