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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넘봄 | 서평
사람을 따라갈 때 보이는 좌표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 이 글에서는 ‘중심’이라고 잠시 이름을 붙여볼까 한다. 강사, 기획자, 예술가, 실무자, 보조인력, 활동가 등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개별 사람들에게. 그 ‘중심’이 본래의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로 쓰일지 혹은 다른 단어로 대체되어 쓰여도 무방할지 고민해 보는 것은 읽는 이의 몫이다. 


 만약 우리가 문화예술교육에 있어서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보통 그 ‘잘’은 ‘효과적으로’라는 의미로 일반화되어 쓰이곤 한다. 그렇다면 교육은 효과가 있어야 할까. 교육사업 기획서 후반부에는 ‘기대효과’를 최소 3가지씩 꼬박꼬박 적어 넣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효과를 실험할 수 있는 시간이나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얼마나 충분하고 명확한가. 기대효과를 내기 위한 현실적 지원이나 활용 가능한 자원은 누가, 어떻게, 얼마나 확보하고 지원해주고 있는가. 설마 몇 개월짜리 지원사업, 불안정한 고용상태, 실험보다는 실행이 다급한 상황 안에서 사람도 삶도 심지어 사회도 바뀌길 바라는 것은 아닐 테지. 설마. 

 혹은 문화예술교육의 효과를 핑계로 사회나 조직이, 또는 누군가가 ‘중심’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교육은 같은 배를 끌고 있는 사람들 개개인도 충분히 살피지 못하면서 저 멀리 보이는 어떤 의미나 목적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화예술이 무언가를 가르쳐야 하는 학문이 되니, 그 ‘무언가’와 ‘가르치는 목적’과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만 강조되어 그것을 행하는 ‘중심’들이 소진되고 있다. 문화예술은 사회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논리 안에서 이 ‘중심’들의 삶은 더더욱 소외된다. 좀 덜 임금을 받아도, 좀 덜 먹어도, 좀 더 일해도, 좀 덜 쉬어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해직 강사가 쓴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저자 채효정)’도 이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이 책은 (교육이든 삶의 현장이든) 어떤 활동의 주체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과, 그 조직이 표방하는 주제 안에서 소진, 소외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대학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대학이 누구를 위해, 누구와 함께 존재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단지 대학의 역할을 강조,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대학을 굴러가게 하는 모든 이들이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문화예술교육 현장으로 돌아와 ‘중심’들은 교육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관념적으로 들리기도 하는 이 질문을 좀 더 긴 예시로 풀어보자. 

 “지역문화재단의 문화예술교육사업에 참여하는 A는 2시간 수업에 44,000원의 강사료를 받는 보조강사이자 예술가이다. 1년간 정부지원을 받는 이 교육사업은 총 20회 진행되며 내년에 또 사업이 선정될지는 그때까지 알 수 없다. 
 A는 수업을 전반적으로 기획하지는 않지만, 재료를 준비하거나 자세한 활동내용을 계획하는 역할을 해야 하며 한 달에 1회 강사 회의에도 참여한다. 초등학생 10여 명과 진행하는 수업 안에서는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뭐라도 좀 같이 해보자고 다독인다. 
 수업이 진행되는 장소는 A가 사는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1시간이 넘게 걸린다. 자동차가 없는 A는 매회 무거운 수업 재료를 들고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를 오간다. 수업이 끝나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밥을 먹을 때에는 밥 먹는 모습이나 회의하는 사진을 따로 촬영하고 집에 돌아가 회의록을 작성한 후 정산보고서를 위해 영수증을 정리한다.”

 A에 대해 함께 질문을 던져보자. 

하나. A가 2시간 강사료로 44,000원을 받는 것은 합당할까.
둘. A는 보조강사 역할을 몇 건 정도 동시에 해내야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셋. 만약 A가 5건의 보조강사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는 그 역할에 모두 충실할 수 있을까.
넷. A가 교육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지 아닌지는 누구, 무엇에게 영향을 줄까.
다섯. A는 왜 수업을 위한 이동, 식사, 휴식을 알아서 해내거나 증명해야 할까.
여섯. A가 수업을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은 수업 재료 준비와 수업 보조가 전부일까.
일곱. A는 내년에도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믿거나 기대할 수 있을까.
여덟. A는 앞으로도 이런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것에 자발적 동기를 가질 수 있을까.
아홉. A는 현재 행복할까.
열. A는 자신이 문화예술교육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까.

 이쯤에서 나에 대해 털어놓자면 난 A보다는 조금 더 강사료를 받는 주강사의 역할을 하며 10년째 살아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것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개인 창작을 하는 예술가이며 운 좋게 지원사업에 선정되면 문화예술교육이나 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기획자이자 강사이다. 출산 후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때는 동네 학교에서 방과후 강사를 몇 년 하기도 했다.

 이런 나의 입장으로 위의 10가지 질문에 답변하자면 답변과 답변 사이에 한숨만 쏟아진다. 압축적으로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그건 분명하게 ‘아니다’이다. 그리고 이제는 대부분 사라진, 어디선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중심’들의 답변도 어느 정도 상상이 된다고 감히 말해본다.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해직한 강사가 받았던 대우나 통보가 구체적으로 ‘중심’들이 받는 그것과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그러한 상황을 발생시키는 구조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목적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적이 담론이거나 효과이거나 성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손에 잡히지도 않고 숨을 헐떡대지도 않고 발을 동동 구르지도 않고 힘들다고 푸념하지도 않는 것들. 

 그러나 사람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면 피곤해지기 일쑤다. 이 사람 저 사람 사정 다 봐줄 수 없다. 사정이 다 다르니 그거 따라가다가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 ‘어디로’를 정할 필요 없이 ‘사람 먼저’라고 하다간 요즘 같은 세상에 미련하거나 어리석다는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도 언제나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생계가 불안정하기도 하고, 배가 고프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하고, 감정에 치우치기도 하고, 능력이 좀 부족하기도 하고, 일의 효과적 진행보다 마음이 쓰이는 것을 먼저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서로를 살피는 과정 안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삶에 대한 철학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그것은 문화도 되고 예술도 되고 교육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문화예술교육은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보다 어떤 주제로 교육을 ‘한다’라는 것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이 연속되면 그 주제가 담고 있던 문제의식은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한다’, ‘안 한다’로 이분법화 되어 타자의 정치나 사회적 담론 안에서 간편하게 소모된다.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전공 교육의 특수성과 전문성 이전에 먼저 인간의 삶을 배우고 읽어야 한다’는 보편적 교육의 이념을 담고 출발했으나 현장에서는 그 이념을 위해 함께 노력했던 사람들을 모두 주인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과 같이. 교과 개편을 이유로 100여 개의 강좌가 정리되어 수많은 강사가 갑자기 강의의 기회를 잃은 것처럼. 그럼에도 후마니타스칼리지가 보편적 교육의 가치를 표방 ‘한다’는 것은 마치 어떤 기업의 브랜드 마케팅처럼 변함이 없듯이. ‘하고 있다’라고 하면 실제로는 어떻든지 간에 그 자체로 우선적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어떤 주제를 ‘한다’고 스스로 말하기 전에, 그와 관련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사람을 챙기고 활동을 채우는 사람, 사람, 사람, 그리고 ‘중심’들이 있다. 그들은 이따금 그 문제의식이 뒤늦게 만들어낸 공동의 테두리 안에서도 밀려나곤 한다. 어느새 지혜란, 각자의 문제의식을 도드라지게 드러내지 않으며 테두리 안에서 최소한의 자리 확보를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쨌든 버텨내라’는 말을 애써 길게 쓰자면 말이다.

 그만큼 단지 버티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 A의 삶을 보라. 수많은 A들, ‘중심’들. 많은 삶의 영역들이 그러하지만, 문화예술교육 현장은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는 경향 때문에 더더욱 ‘중심’들에게 힘든 장소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심’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정책이나 제도를 결정할 때, 예산지침이나 행정절차를 강조할 때, 현장이나 사업을 평가할 때, 교육의 의미를 논의할 때, 기획서를 쓸 때, 수업을 진행할 때, 그리고 교육현장과 직접 연결되어있다고 여겨지기 힘들지만 분명 연결된 삶의 매 순간.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중심’들을 위해서일까. 

 마지막으로 내 주변에 분명하게 있는 ‘중심’들의 본래 이름들을 마음속으로 나열해본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되어 불리거나 여겨지든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심지어 교육의 주제를 증명해내는 것보다 먼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예산을 투입‘했고’ 우수한 사업들을 ‘했다’는 답변은 정중히 사양한다. 이미 많은 ‘중심’들이 현장을 떠나거나 튕겨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지금부터 기억하자. 사람을 기억하고 챙기는 것에서 우리는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 최선영

예술가이자 창작그룹 ‘비기자’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비기자’는 무한경쟁시대에, 각기 다른 생각들이 꾸준하게 비길 수 있는 현장을 인문학적 문화예술 활동으로 만드는 창작그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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