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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곁봄 | 칼럼
가르침과 배움의 균형에 대하여
백현주 / 수원시평생학습관 기획실장

 

 나는 수원시평생학습관이란 곳에서 일한다. 평생 교육이 아니고 평생 학습이라고 한 데에는 사람들이 그저 강의를 듣고 지식을 쇼핑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배움과 깨달음이 일어나는 곳이길 바라서이다. 저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필요에 맞는 배움의 방향과 기술을 터득해서, 스펙이 아니라 진짜 삶에 필요한 힘을 기르면 좋겠는 거다. 강의보다는 선생 없이 서로 배우고 익히는 학습자 모임을 조직하도록 자극하고, 학습관 안에서가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뭔가 해볼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더 힘을 쏟는 이유다. 하지만 그렇게 자발적인 배움을 조직하는 데 나서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극소수이다.

 

가르침 또는 이끄는 자에 대한 목마름

 

 근대 학교교육 이래 가르치는 일과 배우는 일은 역할 구분을 넘어서 위계가 분명한 일이 되었다. 가르치는 자는 위에, 배우는 자는 아래에 자리하게 됐고, 전자는 성인이면서 권위 있는 자, 학습의 주체로, 후자는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로, 설교를 듣고 받아쓰고 암기하는 복종하는 자, 학습의 객체로 호명되었다. 사실 지금의 성인들, 곧 우리 대다수가 이런 교육 분위기에서 자라왔다. 반면에 평생학습은 학교로 독점되었던 교육의 장을 전 생애에 걸친, 일상의 모든 시공간으로 확장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학교를 벗어나서 배울 뿐 아니라 생애 전 과정에 걸쳐, 그러니까 아동이나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들도 배운다. 아이들을 미성숙의 상태로 규정하고, 이들을 적응의 규율을 내면화한 성인으로 키워내고자 한 것이 학교교육이고, 이 학교교육에 대한 반성으로 나온 변혁적인 개념이 바로 평생학습이다. 평생학습에서는 성인이 학생의 자리로 내려올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관계를 해체한다. 성인은 능동적으로 가르치는 자와 협상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과 속도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평생학습의 현장에서 만나는 성인 학습자에게서 능동성을 쉽게 찾아보긴 쉽지 않다. 참여하는 배움의 형태도 대개는 강의여서 성인이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면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나를 성찰하고 교훈을 얻는 쪽이 아니라 강사와 강의에 대한 품평, 소비자의 상품리뷰에 가까워졌다. 교육이 마치 리모컨을 돌리듯 다양한 강의 프로그램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그 시간을 보내도록 디자인된 새로운 콘텐츠 서비스가 된 것이다. 여기서는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의 일방적인 쇼가 있을 뿐이고 진짜 배움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배우는 자로서의 낮은 위치에 대한 익숙함, 나서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수줍음, 능동적 주체로서의 경험 부족, 그런 이유들로 인해서 소극적이기는 해도, 배움의 태도를 함부로 저버리지는 않는 학습자들이 더 많다고 믿고 싶다. 그들은 강사의 말 한마디, 글귀 하나에 의미를 따져가며 귀 기울여 듣고, 자신을 투영하며 반성하고 아파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가르침에 목말라있다.


 얼마 전 개봉된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의 한 장면은 사람들이 이 가르침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한마디로 집약해준다. 새로운 포스(force)’의 소유자이자 주인공인 레이는 마지막 제다이 루크 스카이워커를 만나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가 절 이끌어주었으면 좋겠어요. I need someone to show me my place in all of this.”

 

 스스로 자신의 포스를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만 한 레이는 루크에게 가르침을, 스승이 되어줄 것을 구하고 있다.

 

 한유(韓愈)사설(師說)에 의하면 스승이란 책을 주고 문법을 익히게 하는 자가 아니라, ()를 전하고 학업을 제공하며(授業), 의혹을 풀어주는(解惑) 존재이다. 도란 길이고, 레이의 말처럼 스승은 길을 이끌어주는 존재다. 수많은 길 앞에서 어디로도 성큼 발을 내딛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 때에 누군가, 나보다 지혜롭고 현명하고 성숙하다고 믿는 누군가가 그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괜찮다고 그 길에 들어선 나를 응원해준다면, 나는 그 길을 완전히 불안을 떨쳐버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비교적 경쾌하고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미혹의 시대에는 길을 물어보는 이도 없고 진정한 스승도 가르침도 들어설 자리를 잃어 간다. 비록 강의실 안이기는 하지만 애타게 가르침을 구하는 이들은 그래서 우리에겐 희망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가 가는 저 길이 맞는지 의심을 품고 그 의심을 풀고자 배우고자 하고 스승을 곁에 두길 원하기 때문이다. 막상 다른 길로 접어들 한 발짝은 스스로 떼지 못하고 자꾸만 스승을 돌아보긴 해도 말이다.

 

평생 학습이 아닌 평생 학생


 배움의 한자인 ()은 본받음, 곧 자신의 부족과 결핍을 자각하고 외부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현재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이를 바탕으로 갖게 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자신이 알지 못하고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것을 만나 관점과 사유를 성장시키는 일이다. 이를 통해 변화와 성장의 가능성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가능성이 실제의 변화와 성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또 다른 과정이 필요하다. 새롭고 낯선 것을 충분히 다룰 수 있게 되는 과정, 아는 정도를 넘어서 할 줄 알게 되는 과정, 즉 익힘 ()의 과정이다.


 習()은 깃 ()에 흰 (), 날개가 하얗게 보일 정도로 날갯짓을 하는 새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새가 그토록 날갯짓하는 이유는 날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는 상태로 변화를 꾀함인데, 피나는 날갯짓 연습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익숙하고 편안한 둥지를 박차고 나와, 낯설고 위험한 둥지 밖으로 몸을 던지는 선택이 아니면 날 기회는 생기지 않는다. 둥지 밖은 비상이 아니라 추락이 기다리고 있을지언정 한 번 진짜로 날아보아야 한다. 그런 위험을 감행하는 무모함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결코 날 수 없다. 둥지 안에서 숲을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새는 추락을 경험하면서 죽기 살기로 날갯짓을 한 이후에야 비로소 자유롭게 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학습’, 배우고 익힘의 결과이다.


 태어나고 자라 내 삶의 길을 선택하고 나아감에 있어서 때로는 외부의 어떤 것에 의지하고, 때로는 나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과 주체적 의지에 따른다. 그러니까 내 삶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보면 가르침과 배우고 익힘이란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하고 긴장하는 관계로 내 삶을 이끄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외부의 가르침에 의지할 것이냐 자신을 믿고 의지하느냐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것이고, 그것을 함부로 비판할 수는 없다. 결국 어쨌거나 가르침의 의미는 가르치는 자에게 있는 게 아니라 배우는 자가 꾸려나가는 삶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핵심을 가리고 배움과 가르침의 긴장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세력이 있다. 교육시장과 교육정책을 만드는 교육의 공급자들이다. 이들은 배우는 자, 자신의 길에 접어든 자에게 현실세계로 나아가 익힌 것을 적용해보는 과정을 안내하기보다는 이들이 가진 두려움의 심리를 가르침의 세계에 묶어두어 교육시장을 키우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시장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공공영역에서조차 교육의 목적은 배움의 능동성과 성장하는 삶에 있지 않고 교육사업과 교육 프로그램의 영속성에 있게 되었다. 교육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기관의 프로그램 실적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고객이다. 그러다 보니 학습자가 어린이든 성인이든 능동성을 키우는 쪽이 아니라, 당장의 욕구를 수용하는 쪽으로, 다시 고객이 될 수 있는 쪽으로 모든 교육기획이 방향을 맞추게 되었다.


 여기에 적응한 사람들은 이제 현실로 나가 해보는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실전을 최대한 유예하는 대신 계속해서 교육받는쪽을 택한다. 더군다나 일자리도 설 자리도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사회는 이런 분위기를 증폭시킨다. 그리하여 이들은 한 사회의 구성원이자 성숙한 개인으로서 필요한 때에 자신과 이웃과 세계에 책임 있는 당당한 주인으로 나서기보다는, 항상 뒤에 숨어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평생 학생으로 남는다.

 

문화예술교육, 가르침을 다시 세우기


 문화예술교육은 어떤가. 비대해진 예술강사제도는 학습자가 아니라 가르치는 노동의 지속성이 우선되는 정책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회당 강사비 지원을 기본 틀로 하는 많은 지원사업들은 학습자가 누구이든 결국은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통제하기에 쉬운 방식으로 펼쳐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문화예술교육이 가르침이 과하게 작동하는 예능교육의 대안으로, 일그러진 학교교육에 대한 대항으로 출발했지만, 문화예술 전공자들의 일자리 창출과 결합하는 순간, 이 정책은 쉽게 비난할 수도 없는 영역이 되고 말았다.


 “가르침에서 배움으로라는 지지봄봄의 제안은 공급하는 자 혹은 가르치는 자의 입장이 압도하게 된 문화예술교육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가르침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가르침이 제거된 배움을 전면화하자는 게 아닐 것이다. 오히려 가르치거나 공급하는 쪽에 진정으로 문화예술교육의 가르침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침과 배움의 본질을 환기해준다. 이 호에서 함께 다루게 될 광주의 청소년 플랫폼 마당집이나 수원의 시니어 플랫폼 뭐라도학교’, 그리고 아쉽게도 다루고자 했으나 게재가 여의치는 않았던 장애인 노들야학의 사례는 이를 위한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스타워즈 얘기로 돌아가 보자. 레이의 스승 요청은 거절당하지만 그녀는 포스를 다룰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그녀가 평범한 사람의 자식인 것이 드러나면서 포스란 특별한 피의 유산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밝혀진다. 잠들어 있는 포스들은 결국 누구에게서나 스스로 깨어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빛의 포스가 될지 어둠의 포스가 될지는 결국 포스의 주인이 살아가는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인연에 달려있을 것이다. 그것이 결국 가르침일 터이다.



지지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