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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더봄 | 좌담회
‘문화예술교육, 체험에서 경험으로’


일    시 : 2017. 11. 21(화) 15:00-18:00 

장    소 : 스페이스 노아
진    행 : 김월식(무늬만커뮤니티)
참 석 자 
 - 임상빈(잔꾀)
 - 김소연(연극평론가)
 - 박도빈(동네형들)
 - 한승연(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센터장)
 - 최지원(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지지봄봄》 담당자)
 - 김은기(녹취)
 - 이재각(사진촬영)



 

김월식 

 지지봄봄 22호 주제는 ‘체험에서 경험으로’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룰 것은 미적, 예술적 경험입니다. 지난 9월에 진행했던 매개자 역량강화 워크숍 <<상상력의 징후>>를 추진하며 가졌던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왜 지금 우리의 문화예술교육이 전체적으로 혹은 전국적으로 변별성 없이 하향평준화 되고 있는지를 첫 번째 질문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전국적으로 비슷한 유형의 수업들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술강사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자기 정체성이 반영되지 않았거나 지역적 맥락이 수업에 개입되거나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니터링을 담당하는 위원들의 컨설팅이 전국적으로 비슷한 관점으로 문화예술교육의 비평적 지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사업에 참여하는 분들이 교육 현장을 같이 관찰하면서 모니터링을 하는 방향으로 바꾸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분이 다른 예술가들이나 단체는 어떻게 문화예술교육에 접근하는지 궁금해하십니다. 저 역시 현장에서 교육을 많이 해왔지만, 타자의 교육을 모니터링 하면서 자신의 교육 철학과 접근 방식에 대해 반성하게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모니터링이 감시나 평가처럼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민하는 상호 성장의 기회가 되도록 설계되었을 때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상상력의 징후>> 는 예술가의 상상력이 작동되기 이전의 기제들을 활용한 매개자 역량강화 워크숍이었습니다. 기존의 여러 워크숍에서는 참여자들의 다양한 생각이 기획서 안에서 혹은 워크숍의 목적과 가이드라인 안에서 표준화되어버리거나 다양한 관점이 희석되는 결과를 종종 보아 왔고 그 부분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작가들 스스로의 창작 기제들을 이야기하면 그것을 모더레이터가 읽어내고 전체적인 과정을 관찰하는 기록자가 개인과 의미의 언어로 기록을 남기는 방식의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문화예술교육이 동시대의 철학과 고민에서 발현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 끝에 나온 워크숍 방식이었습니다. 
 
 임상빈 선생님에게 부탁드린 것은 체험 교육에 대해 비판적인 성찰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최근의 문화예술교육 수업들은 체험 교육의 틀 안에서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한 예술 체험을 하는 흐름으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교육적 관점으로서의 문화예술을 통한 교육은 때로는 조금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실수해보기도 하는 것이 중요한데 단순 체험형 교육에서는 개별적 성찰을 위한 실천적 기제로서의 예술교육, 과정 안에서 주체적으로 경로를 경험해보는 미적 수행과 이를 통한 실천은 조금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러한 문제점들과 연관 지어 문화예술교육을 실행했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글에 담아주셨으면 합니다.

 김소연 선생님에게도 비슷한 부분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좋은 전시나 공연을 보면 그 자체로 문화예술교육적 효과가 있습니다. 단순히 감상 교육적 측면이 아닌 개별적 사유와 시간 사용의 측면에서 바라봐주셨으면 합니다. 전시장에서 똑같은 속도로 전시를 보는 것만큼 잔인한 건 없거든요. 감상 교육은 각자의 속도로 관찰하고 사유하면서 개인적으로 생각할 기회와 미적 수행과 실천에 대한 의지를 갖도록 해야 하는데 오히려 동일한 교육 시간을 적용하면서 다양성을 생산할 기회를 차단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전시와 공연을 좋은 교육으로 만든다는 것은 어떤 과정에서 가능할까 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박도빈 대표님에게 부탁드린 것은 체험의 주체에 대한 부분인데요. 요즘 자주 회자되는 ‘자기 주도적 학습’ 개념은 자주 오용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비슷한 의미로 문화적, 예술적 활동에서 자기 동기화를 통한 수행의 중요성에 대하여 듣고 싶습니다. 지역에서 축제와 행사를 만들고 실행할 때는 꼭 누가 가르쳐줘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느끼는 즐거움이 있고 지역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들과의 관계에서 서로 학습하는 부분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경험이 문화예술교육적 관점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지에 대한 사례 공유를 부탁드립니다. 처음에는 실수를 많이 하지만 실수를 줄여나가거나 수정하는 과정을 통해 상호 학습, 실천적 학습이 이루어지는 동네형들의 활동들 중심으로 글을 풀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의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체험’ 아닌 ‘경험’을 말할 수 있을까

김소연

 어느 순간부터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개념과 가치에 대한 논쟁이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정해진 조건하에 사업을 잘 수행하는지에 대한 논의로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상상력을 발견하고 예술가의 상상력과 교육의 과정을 어떻게 연결할까 하는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습니다. 가치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작년 <<경기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문화예술교육 콜로키움>> 발표 때 저는 10년 동안 사업이 정책적으로 크게 확대되었는데 왜 이렇다 할 논쟁이 없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문화예술교육의 가치에 대한 공동의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토대가 다져지지 않으니 담론은 담론대로 사업은 사업대로 제각각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김월식

 지역에서는 민간 영역에서 청년들의 소위 ‘짓거리’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예술 프로젝트들이 나오고 있고 이런 것이 새로운 상상력이 개입될 수 있는 부분인데 예술교육은 자발적 활동들의 생명력이 너무 희박합니다. 발굴도 안 되고 있고요. 이러한 활동들이 뒷받침되어야 제도가 건강해지는데 지금은 제도 하나만 있고 제도를 견제할 만한 바깥의 활동이 없습니다. 지원 사업 10년 동안 민간단체들이 지닌 야생성이 길들여진 것이죠.

 


김소연 

 저는 문화예술교육에서도 비평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평가라는 특정한 직업군에 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교육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 읽어내는 역할이 필요한 것이죠. 새로운 시선으로 읽어주는 구조가 있어야 다양한 사례가 발굴되며 사업의 의미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연극계라고 하면 어떤 신진들이 등장하고 있는지, 이들의 새로움은 무엇인지를 읽어내려고 하는, 그것이 비평가든 프로듀서든 선배 연출가든 새로운 시선으로 읽어주는 역할들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나오기도 하고 그것이 이슈나 논쟁이 되는 것이죠. 꼭 지면을 통해 벌어지는 것이 아니더라도 가능합니다. 문화예술교육의 성장 과정을 생각해보면 현장과 전문가 이렇게 나뉘는데, 전문가 그룹이 거의 사업을 기획하는 그룹이다 보니 기존의 사업 틀을 재생산하거나 모니터링하는 역할에 머무는 것이죠. 지금 등장하는 이 사람, 이 프로그램, 이 현장이 문화예술교육에서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점이 새로운지, 그 새로움이 문화예술교육의 비전이나 목표와 어떻게 부합하는지 충돌하는지 등등을 더 촘촘하게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슈와 쟁점을 생산해야 하죠. 예를 들어 한 예술단체가 기획하고 진행한 같은 프로그램이 어떤 지역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비판을 받는 경우가 있어요. 물론 이를 ‘다양한’ 기준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설령 각각 다른 기준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각 기준의 차이는 무엇인지를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차이를 읽고 쟁점을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죠.

 

김월식

 이러한 지원사업 시스템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는 사람은 결국은 바깥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문화예술교육이 싫은 건 아닌데 지원 사업 안에서 하는 것보다 다른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죠. 

 


김소연

 제도 바깥으로 나오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좋은 것이죠. 문제는 제도 밖이 너무 황량하다는 것입니다. 전체를 생각하면 제도를 잘 만드는 것만큼 제도에 포획되지 않는 바깥 영역을 더 넓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김월식

 문화예술교육의 비평적 지점을 만들어 주는 것이 평가위원들인데 전국의 많은 평가위원의 텍스트가 전혀 공유되지도, 활용되지도 않고 있습니다. 비평의 부재라기보다는 공유하는 방식에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지원기관들에서 하는 워크숍이나 모임들에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실효성이 없는데 단체를 참여하도록 하는 것은 너무 소모적입니다. 단체들이 모임이 즐거웠고 도움이 되었다는 경험을 갖도록 지원기관에서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도빈

 지원사업을 진행하는 단체로서 우리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심사하는지 신뢰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심사위원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 사람이 왜 심사를 하는지 정보도 없고 소통이 전혀 안 되는 거죠. 지원사업 구조에서는 단체에 깊은 고민을 할 만한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사업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조건들이 있는데 그것만 맞춰주고 정산만 잘하면 되는 것이죠. 진짜 하고 싶은 것은 지원 사업을 벗어나 그냥 하게 됩니다. 작년에 진행했던 지원사업에서 컨설팅을 받았는데 작은 규모의 사업에서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건 당연하고 사업의 지속성 확보 및 비지니스 모델 창출과 같은 단기간 안에 할 수 없는 과제들을 요구받았습니다. 사업의 목표가 무엇인지 불분명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소연

 사업의 프로세스를 잘 만들고 진행하는 것만큼이나 평가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정책의 목표가 실행 과정을 거쳐 제대로 구현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평가이죠. 단순히 점수 매기기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평가 지표나 평가 방식이 기준과 가치를 공유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냐고 질문할 때 회의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성 평가 항목은 모호하고 변별력이 없다 보니 정량 평가, 수혜자 수, 만족도 등등이 평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목표와 가치를 공유하고 점검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평가 방식은 지원사업 수행 단체가 단편적인 성과 기준을 충족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죠. 제도 안에서 이러한 부분을 세심하게 점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월식

 얼마 전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직원들과 런던에 다녀와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원 제도의 선발 과정은 밀도가 있지만 선발된 후에는 지원 대상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기관들의 태도였습니다. 그들도 꾸준히 실험해 본 것이죠. 런던의 예술가들에게 지원사업을 왜 하는지 물어봤을 때 지원을 받으면서도 개인 작업을 할 때처럼 충분한 자존감과 명예로움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산을 충분히 지원해주고 성과의 자율성과 사업의 밀도를 만드는 과정, 또 그 의미에 대하여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하게 기다려주기 때문에 어떤 지원 사업이던지 예술가가 개인의 창작 활동에서 성취할 수 있는 과정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죠. 연극, 음악, 미술 모든 분야가 다 공통으로 그렇습니다. 결국, 지원 대상을 존중하는 시스템이 깊이 있는 교육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사업 구조를 설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자의 1년이 왜 새로웠고 가치가 있었는지에 대해 성찰하게 하고 이러한 것들로 성과를 정리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임상빈

 지원사업을 수행하는 단체나 작가로서는 ‘심사, 모니터링 및 컨설팅, 정산’으로 이어지는 지원사업의 구조가 감시 체계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니터링도 점수 매기러 오는 정도로 느껴지고 워크숍도 듣고 싶지 않고 배워도 나에게 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컨설팅이라는 것도 과연 현장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진행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현장 상황은 전혀 다르게 펼쳐집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지만, 아이들과 수업한 내용의 성과와 결과는 어른들끼리 합의합니다. 아이들을 관찰하면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수업의 결과를 부모에게 칭찬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결국 아이 자신의 만족이 아닌 어른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반면에 강사의 목적, 프로그램의 가치 등과 별개로 노는 아이들, 그 시간 안에서 자유롭게 즐기는 아이들이 진짜 문화예술교육의 목적과 맞닿아있는데 그런 아이들은 성과로 측정되지 않고 평가를 하지도 않습니다. 

 

 
박도빈

 동네형들이 활동을 시작한 지 6년 정도 되었는데 초반에는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문화예술교육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기존 방식과 다르게 하고 싶은데 사업 구조 안에서는 실행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최근에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아이들을 바꾼다는 게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나마 사업이 끝나버리면 계속 만날 수 있는 동력이 사라지게 되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차라리 지역 단위에서 열린 관계로 만나는 게 더 장기적으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문화예술교육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업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함께 변화를 고민할  가능성은 청년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청년들은 자발성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원하는 활동에 원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투여할 수 있거든요. 청소년은 시간 제약도 있고 해서 진행하는 입장에선 한계가 많았습니다. 청년 수당을 받는 청년들이나 서울시 청년 정책 안에서 만난 사람들과 여러 가지 활동을 했는데 이 사업들이 문화예술교육이라는 타이틀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저희가 생각하는 문화예술교육의 성과가 나오더라고요. 

 

 
김소연

 문화예술교육이 도입되고 국가 정책으로 확장되었던 근거로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문화예술교육을 통한 창의성의 제고’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화예술교육 사업이 운영되는 방식은 창작지원사업이나 다른 어떤 사업보다 경직되어 있습니다. 보급형 사업이다 보니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얼마나 빨리 확산시키느냐가 목표가 되었죠. 이런 제도적 경직성을 두고 이 구조 안에서 어떻게 잘할까를 이야기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임상빈

 문화예술교육 이라는 말을 놓고 보면 문화, 예술 그리고 교육이 마지막이지만 현장에서의 실행은 결국 교육과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교육문화예술’로 언어적 치환이 필요합니다. 작가로서는 교육을 하는 것과 예술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이 바뀌면 예술강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활동이 교육 활동에서 예술 활동으로 정의가 달라질 테고, 그러면 가르친다기 보다는 작업하는 것으로 태도가 변할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더욱 창의적인 교육 프로그램과 태도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가르치는 퍼포먼스라고 생각한다면, 작가 혹은 강사는 굉장히 다른 교육법을 실행하게 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순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체적, 예술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

김소연

 김월식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나 하고 싶은데요, ‘체험에서 경험으로’라는 제목이 직관적으로 오긴 하는데 체험과 경험을 나누는 구체적인 기준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월식

 저는 시간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주도성도 중요한 지점 중의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체험은 선생님들이 설계한 프로그램 안에서 하게 되기 때문에 계획적이죠. 그런데 경험은 과정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언제든 상황이 변할 수 있습니다. 체험은 실수하면 그대로 끝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경험은 실수해도 기회가 있죠. 그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도빈

 개인적으로 요즘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하면서 고민하는 것은 문화 예술적 상상력이나 경험이 일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체험과 경험은 일상의 결핍이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체험은 그걸 해결할 수 없거든요. 경험은 내 삶의 영역에서 다음의 움직임을 상상하고 연결할 수 있도록 합니다. 

 


김월식

 미적 경험을 통해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게 되고 스스로 주변 상황을 변화시킬 의지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상빈

 체험 행사나 체험 부스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그 단어가 처음 쓰일 때는 좋은 의미였는데 체험 부스가 모두가 같은 형식으로 유행처럼 번지면서 의미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김월식

 체험 부스의 유행은 지자체 축제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단순 체험 자체가 문화예술교육 전반을 대변하게 되면서 문제가 되는 거죠.

 

 
김소연

 관객의 참여, 능동성이 강조되면서 체험 부스가 만들어졌습니다. 자발성, 능동성 때문에 체험이 등장한 건데 체험 활동이라는 것이 내가 뭘 만들었다는 일종의 알리바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탈 만들기 부스를 보면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것을 조립하는 것에 그칩니다. 제작에서 중요한 것은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고, 때로는 재료가 나의 행위에 저항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혹은 활용할 것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표현이 나오는 것이죠. 그런데 탈은 다 만들어져 있고 물감, 색종이로 장식만 하는 체험 부스들이 적지 않습니다.

 

  
박도빈

 형식의 문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도 지역축제를 해보면 몇 개월을 준비해서 중학생부터 시니어까지 참여할 수 있는 부스를 40개 정도 마련해 놓는데, 모든 부스 중 인기가 가장 많은 것은 달고나를 만드는 체험 부스입니다. 6개월 동안 치열하게 고민해도 결국에는 달고나 체험 부스에 사람이 제일 많습니다. 축제라는 형식 안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김월식

 문화와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자기 정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생각해보면 예술 전공자는 예술을 안 하려고 하고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은 예술을 하려고 합니다. 가치의 측면을 다루어야 하는데, 형식적 측면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각자의 결핍을 역으로 드러내는 것 같고요. 문화와 예술에 대해 자기 정의가 조금 더 있으면 프로그램을 훨씬 더 경험적으로 가져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자기 정의가 예술이라는 형식미에 머물러 있으면 단순한 체험 활동의 틀로 들어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축제나 행사에 가보면 부스들이 다 비슷비슷합니다. 개별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방식이면 다양성이 확보될 텐데 말이죠.

 

 
김소연

 다양성이라는 것이 콘텐츠나 프로그램의 형식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고, 도리어 다양성은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다녀온 생활문화 축제를 보면 동아리들이 춤을 추지만 동원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프로그램 자체를 본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최 측에서 기획한 프로그램 안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박도빈 대표가 말씀하신 달고나라는 콘텐츠는 사실 익숙합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즐기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내 주변 이웃들이 만들어놓은 공간이기 때문에 다른 공간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죠. 자발성과 다양성은 그 판을 만든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아이돌 노래를 부르더라도 스스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있으면 재미있거든요. 청소년 문화 축제라고 해 놓고 이벤트 회사가 만들어준 무대에 조명 설치해 주고 커다란 영상을 쏘는 형식이면 재미없죠. 새로움은 새로운 콘텐츠를 고안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과정이 무엇이냐에 따라, 설령 아이돌 가수의 노래와 춤을 따라 하는 것이더라도 굉장히 다른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술이 무엇이라는 자기 정의가 있으면 형식을 가장하지 않고 무언가를 할 수 있겠죠.  


박도빈

 제가 10년 전, 처음으로 자신을 예술가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김월식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을 예술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몰랐거든요. 김월식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전시를 하실 때 옆에서 쓸데없이 같이 무언가를 했던 경험이 저에게는 문화예술교육이었습니다. 전시를 준비하고 이야기 나누던 그때, 몇 년간의 시간이 쌓여서 지금의 동네형들 활동을 이어가는 기반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한정된 시간과 커리큘럼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제가 경험했던 방식으로 예술가와 관계를 맺는 것, 같이 전시에 참여하고 공연에 참여하는 것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의 입장에서 김월식 선생님은 예술가이지 ‘주강사, 보조강사’라는 역할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김소연

 과정 중심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는데, 대화를 하다 보면 개념에 대한 정의가 천차만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월식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 경험은 과정 중심이고 실패가 용인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정 중심의 교육 모델처럼 소개되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과정을 세세하게 디자인해서 실패의 여지를 차단하고 교육에 참여하는 이들을 얼마나 많이 혹은 모두 정해진 성공의 결승선에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하게 하는 것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과정 중심이 결과를 만들지 않는 것, 결과를 지우는 것, 결과를 측정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보입니다. 이렇게 개념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이해도를 보면서 김월식 선생님 말씀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결국 ‘실패’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정 중심은 실패할 가능성까지 열어줘야 한다는 것이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실패의 가능성이 열려있고 실패도 중요한 교육적 결과로 성찰할 수 있어야 과정 중심의 작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패에 대해서도 리뷰를 하고 성찰하면 되는 것이거든요. 하지만 실패를 열어주지 않고, 정해진 결과로 유도하는 것을 과정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교육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최지원

 긴 시간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지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