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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가봄 | 현장스케치
안전하지 않은 상상에 대한 응원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아빠의 코 고는 소리를 녹음한다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경기문화예술교육 매개자 역량강화 워크숍 ‘상상력의 징후’ 중간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왔다. 본 워크숍은 이러한 물음들을 뜬금없이 던지면서도 과연 그것이 정말 뜬금없는 것인지 또 다시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워크숍은 교육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교육만을 위한 상상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아빠의 코 고는 소리, 그것을 녹음해보고자 마음을 먹은 누군가의 고민, 녹음의 타이밍이 어긋나버리는 상황, 이 모든 것들이 교육을 위해서 기획된 것들은 아니지만 그것이 교육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하듯이 말이다. 

 워크숍에서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 교육이 되고 무엇이 교육이 될 수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우리가 교육이라는 것을 얼마나 더 넓고 깊게 상상해볼 수 있을지가 중요했다. 또한 그 과정에 예술가의 개별 창작활동이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을지, 그 방식과 범위는 얼마나 확장될 수 있을지를 살펴보았다. 창작 안에 존재하지만 쉽게 정리될 수 없는 상상력의 징후들이 그 실험의 단서들로 작용했다. 그래서 워크숍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부지런히 산으로 가기도 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품기도 하고 제도와 행정에 대한 뒷담화로 흐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너무 부질없거나 쓸모없는 논의로 치부되지 않고 그 자체로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야기든 감각이든 그 무엇이든 더 적극적으로 산으로 가도록 내버려두기 위해, 참여자들은 맨발로 주변의 숲을 걷기도 하고, 말없이 요가를 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아빠의 코 고는 소리를 녹음한다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워크숍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더 확장해본다.

 ‘맨발로 숲을 걸으며 개미를 만나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요가를 하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복싱을 하는 것은?’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 옥상에서 볼링을 하는 것은?’
 ‘버려지는 물건들로 체스말을 만드는 것은?’
 ‘햇볕이 비추는 풍경의 일부를 오랜 시간 관찰하는 것은?’
 ‘오래된 이발소들을 찾아다니며 그 모습을 기록하는 것은?’
 .......

 ‘(      ) 하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본 워크숍은 이 빈칸에 특히 예술가의 창작에 관한 것들을 넣어보고자 했다. 워크숍의 기획의도에서 언급된, ‘예술가들이 창작을 하기 전에, 혹은 창작 중에 발생되거나 개입되는 다양한 신호나 행동, 사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빈칸을 채우고 있는 창작활동과 고민들을 안고 10여명의 예술가, 문화예술교육 실무자, 예술강사 등이 워크숍에 참여했고 5명의 모더레이터가 현장의 대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 대화는 더욱 구체적으로 흘러서, 

‘(      ) 하는 것의 (      )이 교육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이야기로 뻗어나갔다. 여기에서 두 번째 빈칸을 채우기 위해서는 예술가가 하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는 무언가 안에 잠재되어 있는 신호, 징후, 가치, 의미, 가능성을 읽어 내거나 번역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술가 스스로 그것을 해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경우, 본 워크숍에서는 모더레이터의 적극적인 개입이 작동되기도 했다. 그것은 수많은 키워드들로 나열되었고 참여자들은 다시 그 키워드들로부터 교육에 대해 상상을 시도했다.
 그래서 이것은 또 다른 질문을 만들었다. 

‘(      ) 하는 것의 (      )이 교육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은 무엇일까’

 그런데, 빈칸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고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고 해서, 과연 우리의 상상력은 확장될 수 있을까. 논의에 집중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한참 많아지고 있을 때, 예술가이자 문화예술교육 기획자이자 예술강사이기도 한, 그래서 또 한 명의 워크숍 참여자일 수 있는 내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교육현장’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만났던 ‘참여자’들이었다. 본 워크숍 현장과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교육 참여자들의 모습은 마치 평행하는 대화, 혹은 엇갈리는 외침처럼, 양쪽으로 나뉘어 허공에서 핑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참여자들이 유독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연스러웠고 다양했다. 그 다양함들을 잠시 언급해본다.

 남겨진 재료 몇 가지를 다른 사람보다 더 챙겨가고 싶은 사람,
 도화지를 가로로 놓아야 할지 세로로 놓아야 할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사람,
 타인의 이야기에 5분 이상 집중하기 힘든 사람,
 연필을 스스로 쥐기에 손 근육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
 작품을 완성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
 옆 사람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은 사람,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칭찬이 꼭 필요한 사람,
 일단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
 부모의 선택으로 수업에 참여한 사람,
 쉬고 싶은 사람,
 말을 할 수 없는 사람,
 익숙하지 않은 재료는 만지고 싶지 않은 사람,
 5분 간격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
 무엇을 하는가보다 누구와 짝을 지어 하는 지가 중요한 사람,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
 앞을 볼 수 없는 사람,
 너무 외로워서 수업 참여보다는 자기 표출에 열을 올려야하는 사람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보지 못한 사람,
 잘하지 못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
 다른 것을 하고 싶은 사람,
 ......
 
 교육현장에서 무엇을 하든 능동적이고 다채롭게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사실 소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사람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자연스러운 것은 더욱 많다. 그것은 본 워크숍 2일차에서 진행된 ‘나쁜 예술과 나쁜 예술교육에 대한 불평’ 시간에 언급된 것들과 겹치기도 한다. 제도적 한계, 행정의 경직성, 담당자나 실무자와의 의견 차이, 공간적 제약, 참여자 부모의 지나친 개입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워크숍 안에서 ‘나쁜 것’으로 전제되었지만 사실 그 나쁜 것들이 촘촘하고 복합적으로 얽힌 현장이 교육의 기본 테두리를 만들기 때문에, 어쩌면 어떤 상태, 혹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본 워크숍에서 말하는 ‘상상력’이라는 것은 이러한 자연스러운 것들을 전제하는 것일지, 혹은 자연스럽다고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은 나쁜 것들 안에서 해볼 수 있는 것들을 전제하는 것일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일반적인 문화예술교육사업을 예로 든다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고, 재료는 정해진 문구점에서만 일주일 전에 구입할 수 있고, 새로 세팅된 정산 시스템을 마스터해야하고, 교육 공간을 바꾸려면 서너 개의 서류와 승인이 필요하고, 보조강사의 인원은 부족하고, 강사나 기획자의 인건비는 10년 째 거의 오르지 않고, 그럼에도 진행하는 활동 안에서 참여자의 일부는 낮은 자존감 때문에 그 활동에 집중하기 힘들고, 몇몇 참여자는 자유로운 활동에 오히려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 자체의 ‘상태(condition)’로 두고 그것을 최대한 끌어안거나 건드리거나 혹은 그것과 부딪힐 수 있는 ‘상상’을 시도하고 있을까.

 혹은 현실의 요소나 참여자의 상황을, 예술가의 주제가 다채롭게 펼쳐지지 못하게 만드는 ‘나쁜 조건들’로 상정해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할 수 있는, 혹은 시도해야할 ‘상상’을 고민하고 있을까.

 문제점이 많다고 여기는 기존의 시스템이 견고해지고 유지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가를 우리는 들여다보고 있을까. 그것을 문제시하기 전에 존중해보려는 순간은 충분히 있었을까. 누군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버티며 지켜내고 있는 현장을, 우리의 상상력과 재미가 작동되기에는 너무 답답하거나 대안적이지 않은 것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고민들은 참여자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는데 그 차이를 만드는 기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 예술가/기획자/예술강사 등으로 불리는 사람을 A라고 칭한다면, A의 창작 주제가 타인에게도 주제화될 수 있는가, 더 구체적으로는 A라는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타인에게도 중요하게 의미화 될 수 있는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교육이라는 것을 기획하거나 실행하는 A가, 과연 자신의 창작 주제를 최우선으로 두지 않고 타인을 만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만약, A의 창작 주제가 최우선이 된다면 교육현장의 여러 요소 중에는 당연히 잘못되거나 느리거나 나쁜 것들의 범위가 넓어질 것이다. 반대로, A가 타인의 이야기나 상황을 부정적인 요소로 두지 않고 그 자체를 어떤 상태로 받아들이며 먼저 귀를 기울인다면 A의 창작 주제는 고민의 일부가 되고 심지어 재검토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본 워크숍에서 염두에 두었던 ‘상상력’ 혹은 그것의 징후는 어떤 범위에서 이루어졌을까. 이것은 참여자들 각자에게 얼마만큼의 의미로 물음을 던지고 있을까.

  질문을 좀 바꿔보려 한다. 참여자들이 워크숍 기간 중 가장 오랜 시간 집중하고 언급했던 것은 자신의 창작 주제나 그것의 변주 가능성인가, 혹은 타인과의 연결이나 소통 가능성인가.

 

 예술가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질문과 주제를 찾으며 작업을 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타인이나 사회를 바라보든 혹은 자신을 바라보든 스스로의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작업을 하기도 한다. 혹은 가라앉지 않은 채로 그저 살아내기 위해 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창작이라면 창작에서 교육으로 넘어오는 순간, 예술가는 좀 더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리드하고, 보듬고, 챙겨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타인이 예술가보다 더 마음이 힘들어보여도, 혹은 예술가의 힘든 마음과 반대되는 가치로 행복이 충만해있어도. 그런 상황에서 예술가는 만감이 교차하지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자 노력해야하는 순간도 온다. 예술가가 작품과 1:1로 만나 침묵의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파닥대는 개개인의 감정들과 제한된 시간 안에서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참여자 중 누군가가 너무 마음이 쓰여 예술가 스스로도 가만히 그 사람과 그림을 그리거나 그저 어떤 음악을 듣고 싶어도, 뭐라도 진행을 해야 할 것 같고, 다른 참여자들도 챙겨야하는 것이 교육이다. 마냥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도 없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긴 시간동안 그저 해보는 것이 쉽게 용인되지도 못한다. 모든 교육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으나 많은 교육이 그러한 상태 안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우리는 부정하기 힘들다.

 


 

 이렇게 사방으로 빽빽한 감정과 상황들 안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창작에 관한 것들을 가지고 본 워크숍에 참여했다. 그 안에는 수년간 리서치하거나 실험하고 있는 작업들과 그것이 결코 담아낼 수 없는 길고 외로운 시간들이 있었다. 그것이 그 예술가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매우 소중할 수 있는 것이 교육 현장에서 타인에게 절대 소중하지 않은 것으로 전달될 수도 있다. 예술가는 이것을 견디거나 인정할 수 있을까. 예술가는 자신의 해석언어가 재미있지만 확고하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유연해질 수 있을지가 교육, 혹은 상상의 가능성을 좌우한다. 워크숍에서 한 모더레이터는 그 확고함을 ‘뚝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혹시 그 ‘뚝심’이 타인의 반응이나 참여를 위해 남겨둘 수 있는 자리는 얼마나 있을까.


 예술가는 사회적 이슈나 사안에 대해 접근하고 그것을 자신의 작업 소재로 다루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사안을 그대로 마주하기보다 가치판단하거나 기존의 가치로 재생산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한 시선이 전제된 상태에서 교육의 언어를 찾게 되면 다양한 생각이나 입장들이(심지어 그것이 작가의 생각과 정반대라고 하더라도) 개입되고 표현되기 힘들다. 예술가는 ‘뚝심’도 있어야 하지만 그 뚝심이, 타인이 지향하는 가치와 다를 수도 있음을 언제나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워크숍에서 한 참여자가 “수업 중에 내가 어떤 의견을 말하기도 하는데, 내가 과연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위치인가 고민이 된다.”고 말한 부분도 이러한 맥락과 이어진다. 

 이렇게 끊임없이 판단을 유보하고 그 근거로 타인과 나와의 위치나 관계를 되짚어보려는 예술가의 태도는, 교육 활동에서 타인과의 공유를 위한 자리를 확보한다. 그리고 그 자리가 커질수록 각기 다른 성격, 가치관, 삶의 역사, 감각이 만나버리는 현장의 소통 가능성도,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는 범위도 커진다. 본 워크숍에서 말하는 ‘상상력의 징후’가 예술적 아이디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술가의 작업을 교육적 방법론화 하는 것 이외의 영역에 어떤 자리가 남겨져 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예술가의 견고한 작업을 여러 형태로 변형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 작업이 중요함에도 남겨둘 수 있는 소통의 ‘여지’, 그 사이의 긴장감은 착하거나 아름답기 어렵다. 교육은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장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소통들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풍성한 상상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예술가에게 상상력의 징후가 많을 수 있는 것은, 예술가가 독특한 아이디어가 넘쳐서라기보다는 남들은 쓸모없다고 여기거나 과하다고 여기는 것을 오랜 시간 해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비언어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좀 이상하기도 한 기운이 가득하다. 미련하고 부질없고 효과적이지 못한 행위와 공정도 넘쳐난다. 그럼에도, 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본 워크숍은 그것이 교육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가를 실험해보았다. 교육은 불완전한 정서와 불합리한 제도와 불편한 관계 안에서, 예민하게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3일간의 워크숍이 끝났고 나를 포함한 참여자들은 다시 누군가를 만나는 현장으로 간다. 그것은 일반적인 문화예술교육사업일 수도 있고, 지역 프로젝트의 단발성 워크숍일 수도 있고, 어떤 기관이 기획해 놓은 주말 프로그램의 일부일 수도 있고, 혹은 친구와 마주 앉은 시간일 수도 있다. 우리는 워크숍 기간 동안 부지런히 논의하고 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환기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상상하거나 조금 다른 교육을 해볼만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렇지만 워크숍에서의 경험들은 다시 어떤 현장에서 제도나 행정의 한계, 누군가의 개입이나 외로움 때문에 무력감으로 변할지 모른다. 그건 얼마나 우리를 또 힘들게 만들까.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교육, 혹은 사람간의 만남이 건강하게 살아있도록 만들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육이라고 말하는 활동 안에서 선을 넘고 불편하고 부조리한 상상이 시작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이 워크숍은 안전하지는 않더라도 바로 그러한 상상을 응원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      ) 하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빈칸에 안전하지 않은 것, 예술가의 창작보다 중요할 수 있는 것, 타인과 함께 해볼 만한 것을 얼마나 여유롭게 상상해서 채워볼 수 있을까.

* 최선영
예술가이자 창작그룹 ‘비기자’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비기자’는 무한경쟁시대에, 각기 다른 생각들이 꾸준하게 비길 수 있는 현장을 인문학적 문화예술 활동으로 만드는 창작그룹이다




지지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