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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넘봄 | 서평
웰니스 신드롬 – 행복을 ‘사적인 것’으로 만드는 기술
칼 세데르스트룀 외 『건강신드롬』
채효정 / 정치학자

 

 

 “이상하지 않아? 옛날에 우리가 어렸을 땐 낚시, 등산, 야영, 들놀이, 물놀이 같은 것들이 다 서민들의 여가문화 아니었나?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문화가 전부 중산층의 표식이 되었어. 소박함은 사라지고 대신 뭔가 세련되면서 돈은 많이 드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지가 않고 그래.”
 
 그런 의문을 문득 품은 적이 있었다. 그 이유를 이 책 『건강 신드롬 』에서 알았다. ‘건강 신드롬’이라고 하면 뭔가 현대인의 건강 염려증이나 건강(정상) 강박증에 대해 다루고 있는 내용인 것 같은데, 책장을 넘기다 보면 놀라운 내용들이 쏟아져 나온다. 원제는 ‘웰니스 신드롬(wellness syndrome)’이다. 이화여대에서 평생교육 단과대를 만들어 신설하겠다고 했던 학과 중의 하나가 그 ‘웰니스 학과’였던가. 
 
 그 때는 잘 몰랐는데, 이 책을 읽으면 지금 많은 대학들에서 왜 이 ‘웰니스-’라는 이름을 단 학과들이 생겨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웰니스 산업은 결국 ‘행복을 창조하는 경제’로서의 “창조적 산업”인 것이다. 이런 창조경제는 심지어 노동도 새로운 개념으로 창조해낸다. “창의적 업무, 유연한 프로젝트, 네트워크형 조직, 선각적 리더십, 심도 있는 소통, 해방적 경영 등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이 도래하면서 일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39쪽) 노동과 휴식이라는 개념을 ‘행복’이란 개념에 버무려 예술적으로 재창조해내는 과정이 곧 웰니스라는 이름의 행복 제조 공정이었다.
 
 저자는 우리가 ‘잘 사는 것’이라 믿고 있는 삶의 방식을 하나씩 해부한다. 그리고 우리가 행복한 삶을 추구하면 할수록 어떻게 행복 그 자체가 물신화되고 우상화되는지, 내가 그런 식으로 행복해질 때 이 세계가 어떤 식으로 끔찍해지고, 나의 행복이 완성될수록 그것을 지탱하기 위한 타인의 삶이 얼마나 짓밟히는지를 폭로한다. ‘그런 식으로 행복해진다는 것’의 의미는 행복을 개인의 성취 과제로 삼고, 개인의 차원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웰니스’라는 단어는 바로 그 ‘개인적 행복’이란 것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러니 제목이 ‘건강 신드롬’보다는 ‘행복 신드롬’으로 번역되었더라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더 잘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한국에서 ‘건강’이란 것은 ‘신체적 건강’으로 협소하게 이해되는 측면이 있으니까 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행복이란 거의 강박증에 가까운 노력이다. 하지만 행복한 집, 행복한 음식, 행복한 가족, 행복한 삶을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설사 행복진다고 해도, 어쩐지 우리는 행복해질수록 공허해진다. 자기의 삶을 더 낫게 만들라고 하는 행복의 주문은 아무리 해도 만족될 수 없고, 일생을 끝나지 않는 자기 경쟁으로 소모시킨다는 것을 실은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집을 라이프스타일 북의 화보집 같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 건강을 위한 운동, 일 분 일 초도 헛되이 쓰지 않는 자기관리, 생태주의적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 정크 푸드를 거부하고 음식을 가려 먹는 것, 어느 곳에서도 멋지게 테이블을 세팅하고 식탁 위에 책과 음악을 함께 곁들일 줄 아는 것, 착한 소비와 공정여행을 하는 것, 계속 새로운 일에 흥미를 가지고 배우고 익히며 자신의 역량을 개발하는 것, 기부하고 봉사하는 삶, 그렇게 사는 걸 다들 잘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 믿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과연?’이라고 묻는다. 왜냐면 그게 ‘신드롬’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건강이 사회적 열광의 대상이 된 것, 그게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건강 신드롬’은 사회적 질병이며, 행복에 광적으로 집착할수록 사회는 불행하다. 

 

 요즘 사람들은 건강과 행복밖에 기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안 건강하고 안 행복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행복의 주체가 절대적으로 ‘개인’이 된 것이다. 국가와 사회의 행복(wellfare)을 통해 개인의 행복을 실현하려던 복지국가(wellfare state)의 이상이 해체된 이후에 행복의 실현은 개인들 각자의 과제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국가 수준의 행복 추구는 ‘웰빙(wellbeing)’이라는 좀 더 작은 행복의 개념으로 되었는데 곧 그 웰빙도 시장으로 흡수되었다. 이제 ‘웰니스’라는 추상화된 행복의 개념은 그나마 그 ‘웰빙’이란 개념 속에 연결되어 있던 ‘존재(beibg)’의 의미도 지운다. 이 웰니스라는 행복을 실현할 장소는 국가도 사회도 공동체도 마을도 가족도 아닌 ‘나의 몸’이다.

 

 이렇게 고립된 개인 주체에게로 소급된 행복 개념은 아침 방송과 종편의 각종 토크 프로그램을 통해 날마다 전파된다. 건강, 다이어트, 미용, 헬스, 스포츠, 음식, 취미, 실내 인테리어, 패션, 요가에 명상까지 ‘잘 먹고 잘 사는 법’으로 가득 차 있다. 웰니스의 전도사들은 사회의 유명 셀럽(celeb)과 의사들이다. 현대 사회는 정말로 의사들이 사회적 질병을 치료하는 시대다. 우리는 셀럽이 국민의 우상이 되고 지도자가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셀럽의 시대는 문화통치의 시대를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위인들은 더 이상 정치인이나 운동가, 지식인이 아니라 스타 셰프와 행복 전도사, 열정 넘치는 기업가다. 그리고 캠페인 표어는 ‘건강과 행복’이다.”(57쪽)

 

 심지어 그들이 자기의 몸을 통해 보여주는 미적 척도는 도덕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책에서는 그것을 ‘생명도덕’이라고 부른다. 그 사람의 생명-신체적 상태가 곧 그 사람의 삶의 건강함을 나타내는 도덕적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피부 상태나 모발 상태, 비만도, 골밀도, 간수치 등이 평소의 삶의 방식을 나타내고, 그 지표가 정상 범위를 벗어나 있을 때 생활방식을 수정해야 할 것을 권고받는다. 출연자들은 드러난 서로의 몸에 대해 부러움의 탄성을 지르거나, 경악과 혐오가 가득한 표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각자의 몸의 상태는 그들이 얼마나 잘 살았는지,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를 판단하는 도덕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생명도덕은 그런 식으로 자기관리라는 이름의 자기규율과 통제의 틀로 개인들을 몰아간다. 이제 그들은 아침마다 과일과 채소를 섭취할 것과 적절한 음식과 적절한 운동과 적절한 휴식을 권고받는다. 처방은 언제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다. 그 처방은 ‘소비’를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위해 유기농 음식을 구매하고 요가 매트를 사고 기능성 속옷을 사고 이불을 바꾼다. 얼마나 라이프스타일을 바꿀 수 있는지는 각자의 구매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경제 사정이 넉넉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개조 상품들도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다. 세탁기나 청소기를 바꾸지 못한다면 세탁기 세정제나 청소세제라도 바꾸고, 아침에 갓 짠 착즙 주스를 매일 배달시켜 먹는 대신 비타민제를 싼값에 대량 구매할 수는 있으니까. 상품에 의해 선택 당하면서도 스스로를 선택하는 주체라 믿는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순간이다. 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상품들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지’로 제공하는 시장사회는 계급화와 차별을 ‘취향의 차이와 선호에 따른 선택의 문제’로 둔갑시킨다. 싸구려 바지를 사는 것은 싸구려 취향 때문이 아니고, 가성비를 따지는 것은 합리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좋은 음식과 적절한 휴식, 레저와 문화생활을 향유하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돈과 시간이 없어서이고 이것은 사회의 문제, 정치의 문제인데 이 웰니스 신드롬은 그것을 교묘히 문화적 취향과 안목의 문제, 자기관리의 문제, 개인들의 선택의 문제로 돌리는 것이다.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웰니스 신드롬이 그 신드롬에 빠진 개인들만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생명도덕은 단지 추종자 개인에게만 고통을 가하는 게 아니다. 이들이 타인과 맺는 관계까지 바꿔놓는다. 웰니스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웰니스 신봉자는 역겨움을 토로한다. 이들의 독설이 공론장에서 통용되기 시작하면, 이성적 논쟁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227쪽) 취향의 정치, 정치의 미학화는 이런 과정을 통해 혐오의 정치를 탄생시킨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이 웰니스 신드롬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징조다. 어떤 문화든 자본과 시장은 그것을 상품화로 연결시켜왔고, 건강과 행복이 상품화된 것도 그 결과이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이 상품의 서열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들의 신분과 계급을 구별 짓고 있다. 그래서 이 라이프스타일이 지배하는 사회를 나는 ‘문화정치적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늘날 이 문화정치적 파시즘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표제어를 동반하고 내가 먹고 입고 쓰고 놀고 살아가는 모든 영역으로 밀고 들어온다. 웰니스 신드롬이 웰니스 파시즘으로 변모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웰니스의 기준에서 벗어난 모든 존재가 교정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되기 때문이다. 흡연자는 자기의 건강만 해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 사회의 건강을 해치는 사람이 되고, 공기 오염의 주범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담배 연기에 면전에서 코를 찡그리며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은 웰니스의 도덕을 거스르는 자들을 현장에서 즉결 심판하는 권리를 가진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공공장소인 도로에서 담배연기보다 훨씬 독한 매연을 내뿜고 있는 자동차 앞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것은 한여름 바깥으로 열기를 내뿜고 있는 에어컨 실외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도착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적 반응이 단지 흡연자들에 대해서만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뚱뚱한 사람들, 누추한 옷을 입은 사람들, 쓰레기 같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사람들, 식당에 아이들을 데려와 떠드는 사람들,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 술 취한 사람들,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대상이 된다. “하층민은 냄새가 난다”는 문장,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그 한 문장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 문장은 이 책에서도 나온다. 저자들 역시 웰니스 신드롬이 계급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를 설명하고, “역겨움이란 감정은 타인의 공중도덕, 문화적 교양, 양육 방식, 패션 감각, 성적 행동, 식습관 등을 재단하는 근거가 된다”고 말하면서 오웰의 그 유명한 문장을 인용했다.

 

 “서양에서 계급을 구분할 수 있는 진짜 비결, 유럽의 부르주아 중 자칭 공산주의자라고 해도 의식적으로 애를 쓰지 않는 한 노동자를 자신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요즘에는 내뱉기 조심스러워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았던 무시무시한 말 한 마디로 압축된다.” - 하층민은 냄새가 난다. 이 문장 앞에서 숨이 멎는 건 왜일까. 이 라이프스타일의 창조와 생명도덕화의 징후로서의 웰니스 신드롬은 부자와 연예인들의 생활 패턴을 동경하는 아침 방송의 소비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중산층 진보사회에서 종종 보이는 ‘북유럽 신드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강남 좌파’란 용어로 상징되는 이런 유럽식의 삶의 방식에 대한 동경과 행복 추구 노선 역시도 노동계급을 하층민의 이미지로, 좌파를 단지 ‘불평분자’로 둔갑시키고, 선을 넘지 않는 자기규율적 통제 주체를 시민적 주체성이라 믿는 질서-시민들의 질서 민주주의를 탄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금의 문화담론과 문화예술교육, 생활문화운동이 이런 웰니스 신드롬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관련 분야에서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꼭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이다. 아울러 이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레나타 살레츨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와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그리고 영국에서 노동계급이 어떻게 하층계급화 -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열등한 존재로 - 되었는지를 다룬 오언 존스의 『차브』도 함께 읽어보기를 권한다.

 

 생각해보면 낚시가 피싱이 되고, 등산이 클라이밍이 되고, 산보가 트래킹이 되고, 들놀이 물놀이가 캠핑이 되고 피크닉이 되고, 놀이터 공원이 테마파크로, 바다가 워터파크로, 민박집이 콘도로 되어간 그 시간이 우리의 삶이 자본과 시장에 종속되어간 시간이었다. 놀고 쉬는데 돈을 쓰기 위해 미친 듯이 돈을 벌어야 하는 삶. 우리는 어떻게 그 삶을 중단할 수 있을까. ‘혼자 행복’은 만인을 불행하게 만든다. 함께 행복한 길을 찾지 않으면 나의 행복도 없다. 지배하는 문화에 대항하는 ‘저항으로서의 문화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 채효정 :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예술과 정치」등의 인문 교양 강의를 하다가 해직되었다. 학교 측에서는 강의가 폐강된 이유는 「스포츠와 정치」라는 ‘중복과목’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과개편 과정에서 인문ㆍ예술 분야 과목들이 대거 축소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불복하고 학교 잔디밭에서 ‘대학은 모두의 것’이란 열린 강좌를 열어 학생들과 함께 문화적이며 정치적인 교육실천투쟁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함께 묻고 답했던 질문들을 엮어 얼마 전『대학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책을 냈다. 


지지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