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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곁봄 | 칼럼
코칭으로서 교육과 진리 생산공동체로서 학교
함돈균 / 문학평론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우리가 엄두를 못 내는 경우, 그 이유는 문제를 한꺼번에 전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문제의 파악은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시야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문제의 풀이는 정교하고 구체적이며 부분적인 방식으로 출발해야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라도 쥐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자. 한국 사회에서 교육 문제는 지극히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로서 인식되는 대표적인 문제다. 개인의 생존과 사회재생산의 차원이 얽혀 온갖 사회 모순의 응축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 문제의 핵심을 커다란 사회구조적 차원으로 접근한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실사구시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한국 교육 문제의 해법을 사람과 사람, 스승과 배우미가 만나 이루어지는 교육 현장의 문제라는 차원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교육방법론의 혁신이 교육개혁의 핵심과도 직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처럼 ‘입시교육’을 교육의 유일한 본질이라고 착각하고 집착하는 사회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교육구국’이라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지만, 한국 사회의 교육이 실패한 교육이며, 교육이 사회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문제 그 자체가 되었다는 사실 역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아마 이 문제 인식의 지점은 교육현장, 즉 학교가 실패하는 지점과도 매우 밀접하게 닿아 있을 것이다.  

 

  한국의 교육현장은 의무교육 과정인 초·중등학교부터 보다 전문적인 성인교육의 일환이라고 할 대학교까지 교실의 풍경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기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방법론적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이 문제점을 잘 인지해 오면서도 달리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하는 식의 자포자기적인 회의론에 빠져 이 관성적 체제를 유지해왔는지도 모른다. 배우는 이의 주체성을 철저히 억압하고 자율성을 전혀 키우지 못하는 ‘타율교육’이 그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교육 행위 자체가 인간을 스스로 서게 하는 성장 시스템이라고 한다면, 주체성의 억압과 자율성의 부재에 기초한 교육방법론에 과연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일까. 푸코나 부르디외 같은 사회철학자들의 관점을 빌리자면, 현행 한국의 교육-학교제도는 감옥이나 병영 시스템 비슷한 사회규율적 신체 만들기 프로그램이나 상징자본 획득을 위한 구별짓기의 장(場, field)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교육방법론 차원에서 보자면, 즉 교사와 배우미라는 두 주체 간의 지식이 교환과 의사소통 방식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의 학교 현장에서 이뤄지는 교육은 주체들 간의 분명한 위계적인 차이를 전제로 한 일방형/수동형/결과중심형/정보형 지식전달 행위라고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미 획득한 정보를 소유한 교사가 학생에 대해 인격적 우위를 전제한 채, 교사-교수의 고정된 식견이 ‘학생’이라는 교육 현장의 또 다른 존재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된다. 교사-교수의 지식은 지식의 위상이나 권위나 가치에 변화가 없이 정보-물건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상호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없는 위계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소통이 아니라 물건의 ‘배달’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 위계적 지식은 배달이 잘 이루어졌는지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역시 사물화되고 관료주의적인 형태의 확인 과정을 반복적으로 거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의 시험제도이며, 이 배달 확인에 따른 상벌체제를 사회적으로 확고하게 제도화한 절차가 바로 ‘(대학)입시’다.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 정보-지식의 교환체제가 갖는 일방성이 대단히 놀라운 것은 ‘학교’라고 불리는 현장에서 학생을 정보-전달의 확인 대상이자 수신처로만 간주할 뿐, 그들도 ‘살아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그들 역시 지식의 중요한 생산자이자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배우는 이들이 ‘주체’로서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서 인식되지도 않으며, 이에 따라 행위의 독립성이나 생각의 자율성이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학교에서 교사-교수를 통해 전달되는 택배형 정보는 이미 완성된 기존 결과물의 송신에 불과하므로,  여기에서 배우는 이들의 성장을 위한 혹은 그들이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공동지식의 생산과정은 교육 행위의 주된 관심 사항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얼굴을 대면하며 말과 생각을 주고받는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이토록 일방적이며 위계적이며 결과중심적인 행위-상벌체계가 제도적으로 수십 년간 지속될 수 있었을까. 이 현장에서 배우는 이들이 가진 생각과 감각과 의견과 재능이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의 ‘성장’은 학교의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그는 ‘정보-물건’의 배달을 받는 사물화된 송신처·주소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형적인 학교에서, 교실에서, 대학의 학과에서, 심지어는 전문적인 식견을 지닌 소수의 연구자를 키워내는 대학원에서조차 교사-교수는 배움의 주체가 되는 학생들이 어떤 생각-재능을 가지고 있는지에 특별한 관심이 없으며, 그 존재를 동등한 대화의 파트너로 여기지 않는다. 한국의 학교에서 학생들도 진리의 도정에 참여하는 공동 주체라는 인식, 생각의 협업을 위한 파트너라는 인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일방적인 정보 전달형 교육 시스템에 근거한 사회가 불행히도, 아니 매우 다행히도, ‘종말’의 시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지식의 유형과 지식유통의 형태 자체가 유동적이며 혁명적으로 변화되는 문명의 전환점에서 교육의 위기는 학생의 위기 이전에 유감스럽게도 교사-교수-학교, 기존 정보-지식 전달자의 위기로 먼저 다가오고 있다. 사물화된 지식은 이제 그들-그곳으로부터 굳이 비싼 수업료와 시간을 써가며 습득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동적 세계, 불확실성의 세계, 테크놀로지 혁명의 분기점에서 인간의 지식은 개별화되고 다양화되며 비가시적인 차원의 잠재적 능력의 원천으로서 다시 인식되어야 할 필요성이 강력히 요구되고 있다. 

 

  교사-교수가 정보 전달의 유일한 원천 소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문명론적 차원에서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환상이다. 국가가 정형화된 지식의 소스를 제공하고 검열하며 그에 맞는 획일화된 기준을 가진 검열-상벌체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철지난 망상이다. 교육 현장의 방법론 차원에서 보자면, 이것은 종래 ‘피교육자’로 간주한 학생을 진정한 주체로 간주하고, 학교 현장을 정보-지식-진리의 공동 생산 과정으로 여기는 인식론적 대전환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이 전환을 ‘공학적으로’ 표현하자면, 학교는 그 자체로 창조성을 생산하는 ‘생각-디자인랩(design lab)’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지식의 원천, 창조적 사유의 근거가 교사-교수-학교-사회가 아니라 배우는 이들에게 있다는 180도 프레임 전환이 요구되며, 교사-교수와 학생은 그 장에서 동등한 대화자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배우는 이들은 학생인 동시에 지식의 생산자일 수 있으며, 교사-교수 역시 교육 현장에서 배우는 이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져야만 한다. 교육은 학생 개인의 고유한 가능성을 꽃피우고 그 삶의 잠재적 행로를 창의적이고 주체적으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모두에게 똑같은 사회적 행로를 강요하고 그 길에서 이탈하는 것을 겁주어 온 군중교육, n+1의 기성품을 생산하는 교육이 아니라, 개인의 잠재성을 통해 그를 유일한 하나(the One)로 가이드해주는 살아 있는 교육의 길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교육은 에듀케이션(education)이라는 추상화된 사회적 제도로 이해되기보다는 ‘배움(learning)’이라는 차원에서 재인식되어야 하고, 교육현장의 방법론은 티칭(teaching)이 아니라 ‘코칭(coaching)’이라는 차원으로 시급히 대전환될 필요가 있다.

 

   최근에 필자가 스탠포드대학의 교육공학자 폴김 교수와 함께 낸 교육대화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세종서적 2017)에서 폴김 교수는 코칭을 ‘교실은 농구팀이다’라는 비유로 제시했다. 폴김 교수는 본인이 수업을 하면서 교사-교수를 ‘교육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농구팀의 코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이 가능하려면 학교-교실의 주인을 ‘정말로’ 학생으로 여겨야 한다. 필드에서 뛰는 것은 학생이다. 그들이 재미있게 게임을 즐기고 즐거운 ‘승리’를 할 수 있으려면, 교사-교수는 그들의 각기 다른 재능과 능력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코칭’을 해야 한다. ‘코칭’은 획일적이고 고형화되어 있으며 위계를 갖춘 정보-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스스로 재능을 꽃피우는 데 필요한 유연하고 순발력 있는 코멘트이며, 상황에 맞는 대화이며, 개별적인 관심 속에서 진행되는 진정한 멘토링이다. 폴김 교수는 이 책에서 ‘좋은 스승은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을 했는데, 왜냐하면 가르칠수록 학생은 스스로 생각하며 문제를 찾고 해결해 나갈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식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 자체가 변화하며, 정보 그 차제보다도 지식의 가공·배치와 적용·실천이 훨씬 더 중요한 상황이 된 지금 시대에 매우 적실한 방법론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이는 교육 현장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배움은 단순하고 무차별적인 차원의 정보 전달이 아니라 교육 주체에게 적절하게 스미는 창조적인 영감이라는 차원에서도 그렇다.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는 시대가 임박했다는 문명론적 증후가 여기저기서 암시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정보 능력에 관해서라면 ‘인간교사’는 지식저장-기계를 따라갈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티칭에서 코칭으로’의 교육방법론적 대전환은 국가가 주도하는 획일적 입시체제에도 혁명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기존의 지식생산·소통·유통-검사-상벌체계는 더 이상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다른 이유를 떠나서 교육이 인간의 성장을 돕고 한 인간이 어떠한 타율이나 억압이나 강요 없이 제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문명의 ‘자율주체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코칭의 교육방법론을 가장 탁월하게 실천했던 인물들이 실은 소크라테스나 공자 같은 고대 사회의 현자들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이 즈음의 현실에서도 새삼스레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지식을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제자들과 늘 대화와 문답을 통해 진리생산의 동등한 공동체를 구성했으며, 제자들의 특성에 따라 늘 다른 방식으로 대화했다. 이 스승들은 답하지 않고 주로 물었다. 그들은 자신을 지식을 낳는 산모가 아니라 배우미들의 진리생산을 돕는 ‘산파’로 규정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이 수수께끼처럼 보였던 것도, 공자의 인간다움(仁)에 대한 정의가 그렇게 다양한 것도 모두 그들이 티처(teacher)가 아니라 코치(coach)였기 때문이다.     
 
* 함돈균: 문학평론가이며,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의 공동대표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있다. 인문정신에 스민 공공성과 시민정신을 발굴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확산하기 위해 동료 학자·작가들과 함께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만들었으며, 시민사회와 대학, 여러 인문예술기관과 공공기관 등에서 다양한 인문예술기획을 설계·제안·실천하고 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2016) 인문철학에세이 『사물의 철학』(2015)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2017) 인문교육강연집 『교사인문학』(공저 2016)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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