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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가봄 | 현장스케치
세계-선을 만들어가는 춤 판 호크마 댄스 씨어터, “바디 토크”
백용성 / 철학자, 문화기획자

 

1

 

  땡볕 오후, 분당 정자동에 도착해 탄천을 따라 걸었다. 멀리 탄천 야외 수영장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렸다. 아파트 단시 사이 다소 한적한 빌라 촌에 자리 잡은 호크마 댄스 씨어터(이하 호크마)는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쾌적하고 밝은 느낌이었다. 올망졸망 벗어놓은 아이들의 신발이 유쾌했다.

 

  수업이 시작되고, 아이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처음 둥그렇게 둘러앉은 몸 풀기가 시작되고, 걷기, 뛰기, 뛰다 멈추기, 악수하기, 다시 움직이기, 움직이다 얼음 하기 등이 계속 이어진다. 아홉 명의 아이들과 세 선생님(조영빈, 심윤아, 김희연)은 매우 자연스럽게 몸동작을 이어나갔다. 거기에 기획자(진윤희)와 그녀가 만져주는 음악도 적절히 반응한다.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서로 접촉하며 주고-받기 식 네 개의 몸동작을 만들기,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각각 적절한 음고와 음색으로 의논하며 만들어 가기 등 단계별 참여도 자연스러웠고, 단계에서 단계로 넘어가는 부분도 매우 적절했다. 약간의 이탈과 웃음, 지나친 장난이 없지 않았지만, 그게 바로 아이-같음이 아닌가! 대략 2개월간의 만남이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만들었으리라. 

 

 

  과정을 보면서 나는 어떤 흥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활발하거나 수줍은 아이들의 모티프와 몸짓과 몸짓으로 이어지는, 점과 대점의 대위법적 전개, 무언가를 억지로 보여주려 몸의 과장이 아니라, 가벼운 리듬 자체를 즐기는 동작들, 그것은 흥이-살아나고-도약하고-이완되고-다시-이어지는 춤-판이 되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리듬이 내게도 파동으로 전파되어, 동조되는 것이었다. 그 때 관찰자는 관찰의 ‘거리’를 잃고, 묘한 참여자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지식에서의 <분리의 논리>, 일상의 <도구 논리>와 대립되는 일종의 <도취의 논리>이자 <관계의 논리>이다. 

 

  도취의 논리는 먼저 고정된 감각상태들을 마사지해, 말랑말랑하게 함으로써 시작되는 데, 그 때부터 감각상태에 묶였던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발달 심리학자인 다니엘 스턴은 그 감각을 ‘생기감응’이라고 했는데, 어쨌거나 풀린 감각은 도취적이어서 고정된 상태들보다는 올라가다, 내려가다, 응축하다, 이완되다, 서서히 나타나다, 사라지다, 폭발하다, 잠잠해지다 … 등 스스로 생기적인 과정이자 리듬 자체이다. 이 리듬을 타면서 어떤 것을 표현할 때, 그 몸은 돈 후앙의 가르침처럼 일상의 몸에서 <에너지 몸>으로 변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를 위한 에너지 몸을 만드는 것은 <훈련>의 문제라기보다는 <수련 혹은 배움>의 문제이다. <훈련>이 단순한 기술 습득에 적용되는 것이라면, <수련>은 열린 배움의 길이다. 우리가 몸짓이나 음악 혹은 미술을 활용한 수업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데, 호크마 역시 이를 훌륭히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한글을 이용한 움직임 찾기’를 워크숍이 시작되자, 선생님이 물어본다. “‘가’를 어떻게 소리내볼까요?” 아이들은 즉흥적으로 제안한다. 그러다 ‘가~’하고 낮게 시작했다가 올라갔다가 다시 낮아지는 파도 형 소리로 결정된다. “그럼, 그 소리에 어떤 몸짓을 만들어 볼까요?” 아이들은 몸을 웨이브 댄스처럼 표현하는 것을 택한다. (어떤 아이는 물로 얼음처럼 떨거나, 왼 발을 높이 차거나 하는 장난에 몰두한다.) 그렇게 ‘나’, ‘다’, ‘라’… 등이 결정되고, 소리내기와 몸짓내기가 결정된다. 내가 볼 때 이때 작동되는 논리는 미리 분리되고 구별된 동작들 혹은 자세들 중에 몇 개를 선택하고 조합하는 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몸-마음의 느낌에 따라 소리를 내고, 그 소리에 따라 몸짓을 해보며, 적절한 것을 추려내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이를 소위 <감각교육>이라고 불렀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감각> 개념은 지나치게 일상적 ‘감각’의 그것으로 좁혀져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감각은 그저 감각의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생각된 것이다. 그러니 감각교육이 아무리 야생적이거나 색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사고 수준에서 감각은 하나의 감각으로 남는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감각하는 행위 속에는 감각가능하지 않은 어떤 것이 감각되는 경우들이 있다. 시각적인 것에도 시각적이지 않은 것이 있다. 이 비감각적 감각, 벤야민이 ‘비감각적 유사성’이라 불렀을 이 감각이야 말로 <감각의 페다고지(pedagogy)>에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하고 시작하는 송창식의 노래를 듣는다고 하자. 이때 우리는 분명히 귀에 도달한 음파를 통해 어떤 것을 듣는다. 특유의 음색, 음의 높이, 분절되는 가사음절, 반주 소리, 박자 등. 하지만 그 소리 아래로 흐르는 어떤 리듬, 색조의 변화, 정조의 변화는 그 자체로 감각되는 게 아니다. 단지 또렷한 감각 언저리에서 어렴풋이 우리는 그 느낌을 가질 뿐이다. 이게 바로 ‘감각되지 않는 감각’의 영역이고, 앞서 말한 생기 감응의 영역이다. 더구나 이 기이한 감각이 있기에 우리는 소리에서 그와 유사하지 않지만 “비감각적으로 유사한” 몸짓으로 이행하고, 몸짓에서 몸짓을 연속적으로 이어가는 안무적 리듬으로 이행한다. 이것이 리만 다양체중의 하나인 민코프스키 공간 혹은 유클리드 공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시간을 품은 세계선(world line)이다. 알베르 미쇼트는 이 물리학적 개념을 갱신해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의 이행에서 벌어지는 변화와 그 변화의 지각현상 모두에 적용해 사용한다. 미쇼트는 세계선(世界線)을 “계속해서 상이한 양상을 띠는 단일한 과정”(혹은 “생성becoming”)이라 불렀다.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지각 대상들을 끊고, 자르고, 고정화 시키고, 언어로 분절시켜 흐름인 세계를 ‘이미 확립된 대상’의 환경세계로 만드는 데 익숙하지만 실상, 세계는 자신의 선을 그리며 나아간다. 문화예술은 이 선을 그 자체로 붙잡고자 하는 노력이 아닐까? 그리하여 특이한 경험을 선사하고, 공유하며 비판과 사유가 가능한 들판으로 이끄는 것은 아닐까?

 

 

3

 “자 이제 우리 몸 안에서 나는 소리를 표현해볼까요?”
 간식시간이 끝나고 다시 수업이 시작된다. 아이들은 저마다 몸 안에 어떤 소리가 있는지 골똘히 생각한다. 꼬르록 소리, 심장 소리, 침 넘어가는 소리 등 여러 소리들이 표현되기 시작하고, 자연스레 몸동작으로 이어진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도 자세히 보면 훌륭한 표현의 오브제가 되는 것이다. 이게 일상의 도구논리를 깨는 도취의 논리이다. 예술은 저 멀리 도달하기 힘든 곳에 있는 게 아니다. 좋은 인생이 우리의 나날의 사이사이에 있듯이 좋은 예술적 계기들도 일상의 사이사이에 숨겨져 있다.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게 도취이고, 사이사이에서 벌어지는 게 관계의 논리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관계는 선이다”고 한다. 그럼, 역으로 우리는 아이들이 그려가는 세계-선은 하나의 관계이고, 생성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대상의 감춰진 면, 타인의 주목받지 못했던 면, 알려지지 않았던 자기 자신의 몸을 다시금 살펴보고, 느껴보면서 나와 나의 관계, 나와 타인, 주변, 세계와의 관계가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다. 이게 윤리적 관계이며 패러다임이다. 어떤 지식의 참과 거짓, 그것에 대한 테스트, 오류의 적발, 수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4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일상의 도구화된 몸과 도취의 몸을 온전히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동시에 그것을 유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그 과정에 대한 자기 통제와 비판적 성찰을 전제하고 있다. 호크마 선생님들은 어쩐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내공(!)을 잘 갖췄다는 느낌이 온다. 교육 참여자들 또한 느낌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러한 자기 통제와 비판적 성찰에 이른다면 더욱 성숙한 교육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정이 끝나더라도 스스로 습득한 비판적 태도와 시각은 지속되며, 이를 계속 유지하면서 삶의 ‘수련’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련은 살아감의 기술터득이자 지혜의 습득이며, 인생의 자기 구축의 미학이다. 따라서 수련 혹은 배움의 과정은 단순한 지식 ‘전달’, ‘전수’와는 다르다. 지식은 진리절차가 끝난 어째보면 김빠진 정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배움과 수련은 부차적인 것으로만 다뤄져왔다. 푸코 또한 진리 패러다임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배움과 수련을 자기 수양의 패러다임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지식-진리의 패러다임에서 윤리적, 미학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이미 알려진 지식들 중에서 무엇을 얼마나 잘 알고, 잘 전달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미지의 영역을 어떻게 발견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배움은 그저 지식-진리에 도달하는 단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식-진리 패러다임을 벗어나 윤리 패러다임에서 보면 배움은 그 자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부단한 물음과 답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 과정은 지식전달의 완료가 아니라 마치 인생처럼, 새로운 세계선의 구성, 새로운 생성의 열린 과정이 될 것이다.

 

  호크마의 ‘바디 토크’는 신체와 소리, 한글이라는 언어요소 들이 어우러져 각각의 스토리와 모두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일종의 여행이다. 따라서 매번 매번이 하나의 완성이 되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일회적인 한 번의 공연을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하고서 짠하고 터트리는 클라이막스 유형이 아니라, 매번 나름의 완성도를 만들어 힘 있는 고원들을 이뤄가는 과정형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상호 포함적이고 상호 성숙의 시간이다. 호크마 대표가 말하는 것처럼 “아이들의 순수한 몸짓”은 오히려 강사들에게 배움의 계기가 되고, 또 아이들은 자신의 숨겨진 몸의 능력들을 발견하는 놀라움과 즐거움의 계기가 된다. 오라 호크마 여행으로!  

 

 




지지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