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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재(OO은대학연구소 1소장)

 

 

 1.

 

 창의와 인성의 문제는 인류가 사회를 이루고 살아온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수많은 논쟁을 낳았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다 보니 지금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의 기본적 품성으로서의 인성을 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좀 더 잘 살아보려 하니 앞으로 같이 살 사람의 발전적 품성으로서의 창의성 요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창의성과 인성에 관한 논쟁은 사회적이고 교육적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수천 년간 지속된 인류의 해묵은 논쟁이 왜 21세기를 즈음해서 집중 부각된 것일까? 공자가 인간의 품성이 닮아야할 하늘의 품성을 천도(天道)”라 한 이전부터도 그랬고 이후로도 그랬듯,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도리인 인의예지신(仁意禮智信)’은 먹고 살만한 시대에 강조하는 것이고, 인간 생명활동의 기본인 의식주(衣食住)가 위협받는 불안의 시대에는 근면’, ‘검소창의성처럼 먹고사는 데 도움 되는 품성이 강조되어 왔을 뿐이라는 주장들 정도를 수용하고 말면 되는데 말이다.

 

 창의성에 대해 공부 좀 해본 사람이라면 찰스 랜드리의 창의도시(Creative City, 1995)로부터 창의영국(Creative Britain, 1998), 창의미국(Creative America, 2000), 리처드 플로리다 창조계급(Creative Class, 2002), 창의한국(Creative Korea, 2004), 아서 크로플리의 창의교육(Creativity in education & learning, 2005),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창의경제(Creative Economy, 2008), 유럽위원회의 창조섹터(Creative Sector, 2011) 등 창의성 관련 주요 흐름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이고, 솔직히 이명박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교육과학기술부 주도로 야심차게 내놓은 초중등 창의, 인성교육 강화 정책까지 접하게 되면, 무분별하고 반성 없는 인성과 창의성에 대한 강조와 정책추진이 지겹기까지 할 것이다. 오히려 부처가 세상만물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상호의존적으로 모두 연결되어있다고 말씀하신 이후로, 그렇다면 부처의 마음과 내 마음 또한 연결된 것이니 내 마음이 곧 부처이므로, 창의성과 인성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것일 뿐이라는 <창의, 인성교육 불가론>이 설득력을 갖는다.

 

 ‘창의성에 대한 그간의 논쟁과 연구는 그 관점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나눠진다. ‘개인의 인지 능력’, ‘새로운 아이디어와 결과를 생산하는 과정’, ‘아이디어와 결과 자체’, 그리고 Keith Sawyer 박사가 강조하는 창의적인 개인과 창작물의 생산과정 및 창작물이 발현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다. <창의, 인성 교육 불가론>은 그 중 네 번째 입장과 가까운데, “창의적 환경이 되면 사람들의 창의성은 저절로 꽃 핀다는 것이다. 이번에 방문한 부천의 대안문화예술공간 [아트포럼리]가 부천시민연합과 함께 부천지역의 탈학교 청소년과 보호관찰 위기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는 <무한도전 문화 예술여행>이 갖는 특징 또한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깨달을 때까지 함께 하는 창의적 환경으로서의 프로그램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2.

 

 부천시민연합의 이사로도 참여하고 있는 아트포럼리의 이훈희 대표는 자신들의 활동이 교육이나 치유가 아니라 예술이고, “계획적이 아니라 즉흥적이라고 한다. 즉 예술적 공간, 예술 작업자, 그리고 프로그램은 아이들의 상태에 따라 언제든 새로운 모습과 관계방식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창의성이 싹틀 수 있는 환경, ‘예술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을 하지 않아도 교육이 이뤄지는 것이고, 상담하고 치료하지 않아도 치유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조금 더 나가면 물질만능주의만큼이나 무서운 예술만능주의가 될 수도 있겠으나, 아트포럼리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아이들이 이곳의 스텝(작가)들과 만나는 태도나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변화와 성장은 이훈희 대표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입장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한다. 다음의 장면 두개를 보자.

 

 

 

 골판지로 집짓기를 하면서 공간에 대한 상상력과 그것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기능을 익혀가는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한 아이가 골판지 주위로 테이프를 가로로 쭉 돌려서 붙이기 시작한다. 그것을 바라보던 교사가 제안한다. “세로 테이핑을 하면 그렇게 많이 붙이지 않아도 되지 않겠니?”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제 어쩔 수 없어요” 교사가 말한다. “음...... 그럼 계속 돌려 가려고?” 아이 머뭇거림 없이 “네!”하면서 테이핑을 계속 한다. 엄청난 학습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행한 방식보다 더 나은 방식이 있음을 알아차렸고, 그럼에도 되돌릴 수 없는 자신의 행함에 대해 끝내 책임져야 할 것이고, 그 결과로부터 교사가 가르쳐주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는데 한 아이는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고, 어떤 아이는 엎드려 있다. 또 다른 아이는 “더워 서 하고 싶은 게 없다”고 말한다. 교사는 이런 태도들에 괘념치 않고 컴퓨터에서 아이들이 서로를 찍은 사진을 형태라인만 살린 그림으로 출력하고 있다. 이윽고 출력물이 다 나오자, 교사는 그것을 먹지와 함께 아이들에게 건넨다. “먹지를 뒤에 되고 라인을 따라 그려봐!” 아이들에게 너무 쉬운 주문이다. 쓱싹! 쓱싹! 아이들이 쉽게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문득 먹지 뒤에 자신들이 그려낸 사진형태라인이 꽤나 근사하다는 걸 느끼고는 점점 잘 해보고픈 마음이 생겨난다. 그때 교사가 말한다. “빈 여백에 색깔을 넣어보면 어떨까?” 만약 교사가 처음부터 이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 것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떤 게 나오게 될 것이라고 모두 설명하고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아이들은 교사들이 바라는 결과물에 자신이 몇 % 정도에 도달했다는 평가치만 가졌을 뿐, 하나하나 자신들의 움직임으로 채워지는 성과로부터의 배움은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창의, 인성교육은 전통적 지식교육이 그 체계의 엄밀함과 완결함으로 인해 도달하지 못하는 불확정적인 상호적 관계와 유연한 환경에 대한 숙고와 기획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아트포럼리의 스텝들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교사로서 갖는 미덕일 것이다. 2009년 교육과학기술부가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창의적인 인재를 기를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구성한다"고 공표했음에도 오늘날 학교 교육은 여전히 입시교육, 지식교육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넘어서려는 학교밖 문화예술교육조차도 지원기관의 행정논리와 매뉴얼지상주의에 갇혀, 창의성이 날마다 새롭게 샘솟고, 함께 하는 관계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깨달아가는 현장의 장면이 더 많이 만들어지는 것을 저해하고 있다. 창의, 인성교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획일적 기준을 벗어나 실패가 한 생각과 행위들조차도 지원하고 지지하면서 주어진 기준에 동화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과 행동을 반성하고 책임지면서 새로운 실천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

 

지지봄봄